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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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金明辰)
1. 기본사항1902년 10월 9일생으로 본적지와 주소는 仁川府 內里 152번지이며, 출생지는 富川郡 大阜面 下洞으로 기록했음. 키는 약 159cm로 검거 당시 직업은 인천공립보통학교 3학년생임. 2. 주요행적인천부 내리(현 중구 내동)에 거주할 당시 보통학교 학생 신분으로 3.1운동에 참여함. 1919년 7월 25일 치안유지법 위반, 住居侵入, 電信法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같은 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1년 4월 9일 만기 출소했음. 출소 후 본적지인 인천부 내리 152번지로 귀향했음. 3. 관련인물이만용, 박철진 4. 기타사항3.1운동 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3학년 생으로 동맹휴교를 이끈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 공훈전자사료관에서 김명진, 손창신, 이만용, 박철준의 판결문을 확인할 수 있음. 1919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하고 구류기간 60일을 형량에 산입했는데, 같은 해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음. 경성복심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으나, 기각되었음. 김명진 판결문의 이유 “제1. 피고 김명진은 인천공립보통학교 3년생으로서 대정 8년 3월 6일 이후 동교의 다른 생도와 함께 동맹 휴교를 하고 있던 바, 동교 직원과 소관 경찰서 사이에 전화로 위 동맹휴교 중의 생도에게 대하여 그들의 행동을 조사하고 훈계를 하도록, 때로는 타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가끔 엄중한 조치를 받게 되었음을 꺼려 그 통신을 방해하고자 하여 피고 이만용·박철준 의 찬동을 구하여 3명이 공모한 후 동월 8일 오후 9시경 피고 김명진·박철준은 인천부 우각리(牛角里)의 인천공립보통학교 내에 침입하여 피고 박철준은 망을 보고, 피고 김명진은 가지고 간 전선 절단용 가위(증 제1호)로 동교 2층에서 전화 공중선을 절단하고 이어서 아래층 사무실에서 전화 수화기를 쳐 부숨으로써 동교의 전화로 하는 통신을 가로 막았으며, 또한 피고 이만용은 이것을 범행하러 가다가 일이 중대함을 깨닫고서 스스로 범행을 중지하고 집에 돌아오고, 제2. 피고 김명진은 이튿날 9일 이 학교에 산책 나갔을 때, 마침 동교 변소 뒤에서 전날 밤에 파괴 방치 유기한 수화기(증 제2호)를 발견하고 차지할 의사로 이를 줏어서 전기한 동 피고의 집에 가지고 돌아와 제멋대로 간직하여 둔 자이다.“ 5. 관련자료김명진 판결문(3건),독립운동사자료집 5 : 삼일운동 재판기록, 김명진(金明辰) 10월 9일생 18세 등 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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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석(金萬石)
1. 기본사항1912년 11월 15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는 仁川府 松峴里 80번지이며, 체포 당시 주거는 일정치 않았음. 체포 계기인 메이데이 격문 사건의 관련자가 모두 인천 활동가인 점을 보면 김만석도 인천에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됨.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상에서는 출생지가 인천부 송현리 80번지로 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는 경성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음. 키는 153.5cm, 직업은 일용인부로 기록되어있음. 2. 주요행적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구류기간 60일 합산)을 선고받고 1935년 1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6년 5월 31일 출감함(지문번호 55857/54959). 1933년 6월 21일 자로 경기도 경찰부장이 경무국장 등에게 보낸 ‘메이데이 檄文事件 關係者 檢擧의 건’에 따르면, 1933년 4월 30일 오전 5시 30분에 인천부 화정 소재 조선정미소 창고와 오쿠다(奧田)정미소 창고 중간의 빈터에 적색노동조합의 기관 서명이 있는 메이데이 격문 약 100매 한 묶음이 투입되어 있는 것을 인천경찰서원이 발견하여 수거하고 관련자를 수사한 사건이 있었음. 김만석은 이 사건의 주동자로 이름이 등장함. 3. 관련인물정갑용, 백봉흠 4. 기타사항보통학교 졸업 후 주로 정미소(미곡상) 직원으로 근무함. 인천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공산주의 사상도 공부하며 점차 심취한 것으로 보임.메이데이 격문 사건 발생 후 1년여 도피 생활을 하다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됨.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후 1936년 출소하였는데 출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자료를 찾기 어려움.한국근현대인물자료에 항목 있음. 1931년 赤勞기관지 격문사건 관계자. 60일 합산. 5. 관련자료思想에 關한 情報綴 2 메이데이檄文事件 關係者 檢擧의 건 1933-06-21 京畿道警察部長, 思想에 關한 情報 6 메이데이檄文事件 關係者 檢擧의 건 1933-06-21 京畿道警察部長, 思想에 關한 情報 6 中國共産黨員 檢擧에 관한 건 1933-08-22 京城 鍾路警察署長, 思想에 關한 情報 6 金炯善 等의 治安維持法違反事件 檢擧에 관한 건 1933-08-25 京畿道知事, 思想에 關한 情報 7 治安維持法違反 被疑者 逮捕에 관한 件 1934-05-31 永登浦警察署長, 思想에 關한 情報 7 赤色勞動組合 機關紙 檄文事件 起訴中止者 檢擧에 관한 건 1934-06-07 仁川警察署長, 昭和 9年 3月 治安情況 各種運動情況, 昭和 7年 下半期後의 重要事件 檢擧, 赤色勞動組合機關紙 檄文事件 檢擧,警察情報綴 控(昭和 9年) 思想情報寫 送付의 件 1934-06-11 仁川警察署 高等係,警察情報綴(昭和 9年) 赤色勞動組合 機關紙 檄文事件 起訴中止者 檢擧에 관한 건 1934-07-05 仁川警察署長,동아일보 1933-05-12 仁川檄文事件 三人送局 주범은 미리 도주 嫌疑者는 釋放 ; 金萬石 도주로 白鳳欽, 尹聖福, 成後永만 송국, 동아일보 1934-07-03 仁川 메이데이 檄文事件, 金萬石 송국(仁川), 동아일보 1935-02-01 仁川赤色勞組 三名에 判決 ; 鄭甲溶, 金萬石, 白奉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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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호(金根鎬)
1. 기본사항본적과 출생지에 대한 기록이 없이 주소가 京畿道 江華郡 府內面 官廳里 462임. 사진의 복사 시점이 1930년이므로 23세라는 연령을 감안할 때 1906년이나 1907년 생으로 추정됨. 2. 주요행적高等課 要視察人으로서 일제의 감시대상 인물임. 체포된 것은 아니고 감시 차원에서 일상 사진을 복사한 것으로 보임. 수원 거주 김병호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복사했는데, 우측에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3810번의 앉아있는 사람이 김근호로 추정됨. 3. 기타사항1928년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수감 중 옥사한 박길양의 장례식 보고 문서에 박길양의 생전 연고자로 나옴. 연령으로 보아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으므로 확인이 필요함. (일본에서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하여 1922년 박열 등과 黑友會를 조직한 인물 중에 김근호가 있음) 1942년 7월의 배재중학교 동정에 관한 건 문서에 강화군 출신 道會 의원으로 나옴. 삼천리 1938년 8월 1일 자에 도의원 김근호를 소개하는 기사가 있음. 여기에 따르면, “지금 말하려는 江華의 金根鎬씨는 아직까지 전도가 양양한 금년 32세의 씩씩한 청년으로서 실업방면 교육방면 정치방면 이렇게 온갖 방면으로 가장 정력가다웁게 그 쾌민한 수완을 베풀고 있나니 현재 그는 京畿道會에 출마한 도의원이요, 江華公普校 후원 회장, 유치원 원장, 재단법인 合一학교 이사, 그리고 또 蔘業, 비료, 정미업, 기타요업주식회사 취체역, 곡물협회장, 인삼조합 이사 등 방면으로 활약하는 분이다. 大正 15년도에 培材高普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나온 직후부터 江華사회를 위하여 십有여년간 분투노력해 온 모범적, 인격자이다.”라고 함. 4. 관련자료學生盟休에 關한 情報綴 朝鮮共産黨事件 獄死者 朴吉陽 葬儀의 件 1928-01-23 京城東大門警察署長, 思想에 關한 情報(警察署長) 培材中學校의 動靜에 관한 건 1942-07-20 京城 西大門警察署長, 思想에 關한 情報(警察署長) 培材中學校의 動靜에 관한 건 1942-07-22 京城 西大門警察署長, 동아일보 1925-07-14 在京江華學生巡講 夏期休暇中에; 演士 李重殷, 李孝順, 琴約翰, 朴勳遠, 沈相台, 金根鎬, 동아일보 1925-08-03 江華學生親睦會 巡講: 吾人의 越向(金根鎬), 배호는 者의 要求(宋甲辰), 學生이본 社會相(琴約翰), 동아일보 1934-08-16 金根鎬氏(江華幼稚園長) 用務로 上京中[會合], 동아일보 1936-01-04 江華合一校에 備品을 寄贈, 金根鎬씨와 崔允燮씨가 올갠과 싸이렌을, 삼천리 제10권 제8호 1938-08-01 多角的 靑年 活動家 道議員 金根鎬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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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충일(權忠一)
1. 기본사항인물카드가 2장 있으며, 두 장의 내용을 종합할 때 1905년 7월 16일생으로 본적은 仁川府 新花水 196번지임. 출생지는 京畿道 江華郡이며 주소는 仁川府 新花水里 196번지와 江原道 高城郡 新北面 長箭里 441번지로 달리 나타남. 키는 167cm이고 두 번째 카드의 직업은 식료품상임. 2. 주요행적①요시찰인으로 작성된 카드로서 곽상훈과 함께 나옴. 순서상 두 번째이므로 사진번호 두 번째인 제13805번이 쓰여있는 앉아있는 사람이 권충일로 추정됨. 2번 카드의 얼굴과 비교해도 틀림없음. 사진 복사 시점이 1930년 11월 5일이므로 그 시점에 요시찰인에 추가된 것으로 추정됨. ②1935년 12월 6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월 28일 출소함(지문번호 55646/84546). 3. 관련인물이수봉, 권문용, 이홍순, 안문식 4. 기타사항인천공립보통학교와 경성의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님. 유도와 검도, 택견 등 무도를 익히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임. 권충일의 부친인 권신일은 강화도와 교동도의 기독교 전파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음. 권충일은 일제강점기에 인천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함. 1927년에는 인천노공친목회(仁川勞工親睦會) 창립에 참여하였고, 1929년에는 인천노동자가 원산으로 출발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노상(路上) 연설을 하다가 곽상훈 등과 함께 체포되어 구류처분을 받기도 함. 또한 신간회 인천지회 회원, 인천청년동맹 간부로 활동함.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사회주의 학습 등에도 노력한 것으로 보임. 1934년 치안정황에 따르면 당시 인천노동조합의 임원인데, 가장 먼저 이름이 나와 대표로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됨. 그러나 1938년 12월 5일 강원도 경찰부장이 보고한 사상전향자 관련 문서와 1938년 7월 25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37년 출소 후 어느 시점에 전향하여 관련 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남.1938년 신문기사 등에 따르면 1937년 출소 후 전향하여 시국대응전조선사상보국연맹 결성에도 참여함. 그의 활동이나 발언을 보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전형적인 친일의 모습을 볼 수 있음. 5. 관련자료思想에 關한 情報綴 第7冊 不穩文書 犯人檢擧와 제2차 頒布計劃 發見에 관한 건 1930-07-28 京城 本町警察署長,思想에 關한 情報 3 赤色勞動組合員의 行動에 관한 건 1932-06-27 仁川警察署長,思想에 關한 情報綴 2 秘密結社 産業別勞動組合事件 關係者 檢擧에 관한 건 1933-06-01 仁川警察署長,思想에 關한 情報綴 2 秘密結社 産業別勞動組合事件 起訴中止者 檢擧에 관한 건 1933-06-07 仁川警察署長,思想에 關한 情報 6 秘密結社 産業別勞動組合事件 起訴中止者 檢擧의 건 1933-06-12 京畿道警察部長,思想에 關한 情報 11 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 京城支部員의 勤勞奉仕에 관한 건 1938-08-10 京畿道 警察部長,思想에 關한 情報 11 思想轉向者의 防共講演會에 관한 건 1938-12-05 江原道 警察部長,思想에 關한 情報 11 大東民友會 懇談會 開催에 관한 건 1938-12-19 京畿道 警察部長,思想에 關한 情報綴 4 申泰益辯護士의 保安法違反事件 判決에 대한 部民의 感想에 관한 건 1939-07-30 京畿道警察部長,昭和 9年 3月 治安情況 附表, 重한 團體表,治安狀況(昭和 13年, 江原道) 社會主義運動 - 共産主義運動,동아일보 1929-01-27 路上講演幹部 各各 拘留處分, 인천 各 사회단체에서 인천노동자가 원산으로 출발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로상연설을 하다가, 郭尙勳, 李昌植, 權忠一, 宋公禮氏等 피검,동아일보 1930-01-08 仁川靑盟幹部 權忠一 釋放,동아일보 1934-03-03 仁川檄文事件 權忠一遂被檢 잠적하엿다가 仁川에서 잡혀 金炯善에도 關係,동아일보 1935-01-15 露領서 潛入한 權忠一送局,동아일보 1935-11-09 權忠一事件 檢事가 控訴,동아일보 1938-07-25 全國의 소위 轉向者들이 京城 府民舘에서 時局對應全朝鮮思 想報國聯盟을 結成하고 다음과 같이 決議文을 發表하다. 6. 비고1930년대 초·중반 인천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전향한 인물로 구체적 조사를 통해 행적을 파악할 필요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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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용(權文容)
1. 기본사항1906년생으로 본적은 仁川府 桃山町 28번지, 주소는 仁川府 牛角里 14번지임. 2. 주요행적1931년 사상단체의 간부를 검거한 이른바 '인천중대계획사건'에서 권평근, 이창식, 김성규, 이수봉, 심경원(심만택) 등과 함께 체포됨. 일제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권충일(權忠一)이 주도했던 적색노동조합 설립에 참여해 인천항 부두 인부의 세포조직 책임자가 되었다고 함. 1934년 5월 28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는데 해당 감시대상인물카드는 그때 작성된 것임. 재판 관계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때는 기소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 3. 관련인물이홍순, 이수봉, 안문식 4. 기타사항1932년 6월 27일 인천경찰서장이 경기도 경찰부장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 앞으로 발송한 ‘赤色勞動組合員의 行動에 관한 건’문서에는 부두인부 야체이카(세포조직)의 책임자로 나옴. 1934년(昭和 9) 3월 ‘治安情況 附表, 重한 團體表’에는 인천부 화정 1정목 10-19번지 소재 인천노동조합의 간부로 나옴. 이수봉, 이홍순, 안문식도 같은 조직의 간부였음. 5. 관련자료思想에 關한 情報 3 赤色勞動組合員의 行動에 관한 건 1932-06-27 仁川警察署長,思想에 關한 情報綴 2 秘密結社 産業別勞動組合事件 起訴中止者 檢擧에 관한 건 1933-06-07 仁川警察署長,思想에 關한 情報 6 秘密結社 産業別勞動組合事件 起訴中止者 檢擧의 건 1933-06-12 京畿道警察部長,昭和 9年 3月 治安情況 附表, 重한 團體表. 6. 비고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운동가로 추정되며, 관련 자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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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창서(具昶書)
1. 기본사항1913년 4월 26일생. 본적과 출생지는 京畿道 廣州郡 中部面 山城里 524번지이고, 거주지는 仁川府 花平里 27번지임. 2. 주요행적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3년간 집행유예로 1936년 4월 20일 출감함. (지문번호 : 45756/44288) 3. 기타사항비밀결사 (경기도)광주공산당협의회 사건 관련으로 체포되었음. 1936년 1월 10일 영등포경찰서에서 광주공산당협의회에 관한 최초 보고가 있었고, 이후 모두 5건의 관련 보고(복사본 1건 포함)가 있음. 4. 관련자료警察情報綴 拱(昭和 11年) 秘密結社 組織에 관한 件 1936-01-10 永登浦 警察署長,警察情報綴 拱(昭和 11年) 秘密結社 廣州共産黨協議會 事件 檢擧에 관한 件 1936-01-11 경성지방법원 檢事正,警察情報綴 拱(昭和 11年) 秘密結社 廣州共産黨協議會 檢擧 送局에 관한 件 1936-03-09 永登浦 警察署長,警察情報綴 拱(昭和 11年) 秘密結社 廣州共産黨協議會 檢擧에 관한 件 1 1936-01-16 경성지방법원 檢事正,警察情報綴 拱(昭和 11年) 秘密結社 廣州共産黨協議會 檢擧에 관한 件 2 1936-01-14 永登浦 警察署長,警察情報綴 拱(昭和 11年) 秘密結社 廣州共産黨協議會 事件 檢擧에 관한 件 1936-04-09 京畿道 警察部長,警察情報寫(副本)(昭和 11年) 秘密結社 廣州共産黨協議會 事件 檢擧에 관한 건 1936-04-09 京畿道 警察部長, 동아일보 1936. 3. 6. 경기도 廣州共産黨協議會事件으로 구속된 石惠(啓)煥. 鄭榮信 등 10명, 경성지방법원으로 송국됨. 5. 비고검거 당시 주소는 인천이나 활동은 본적지이자 출생지인 경기도 광주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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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훈(郭尙勳)
1. 기본사항자료에 따라 1896년 10월 21일 생 또는 1897년 4월 28일 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96년생이라는 기록이 많음. 1930년 11월 인물카드 작성 당시 주소는 仁川府 龍岡町 20번지로서 당시 33세로 기록됨. 2. 주요행적高等課 要視察人으로 작성된 카드로서 權忠一과 함께 나옴. 순서상 네 번째이므로 사진번호 네 번째인 제13807번이 쓰여 있는 맨 뒤에 서있는 사람이 곽상훈으로 추정됨. 3. 기타사항1926년 사상요시찰인명부 추가의 건에는 주소가 인천부 율목리 42번지로 나옴. 1929년 신간회대표위원회에 관한 건에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으로 나오고, 1930년 신간회 대표회원 선거상황에 관한 건에는 총 116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신간회 인천지회의 대표회원으로 權昌一과 함께 나옴. 4. 관련자료檢察事務에 關한 記錄 3 사상요시찰인연명부 추가의 건 1926-04-19 경성 종로경찰서, 思想問題에 關한 調査書類 7 신간회대표위원회에 관한 건 1929-06-31 경성 종로경찰서장, 思想에 關한 情報綴 第7冊 不穩文書 犯人檢擧와 제2차 頒布計劃 發見에 관한 건 1930-07-28 京城 本町警察署長, 思想에 關한 情報綴 第10冊 新幹會代表會員 選擧狀況에 관한 건 1930-10-11 京城 鍾路警察署長. 5. 비고제헌국회(인천 갑), 2대․3대․4대․5대(인천을) 국회의원 역임, 해방 후에는 반민족행위자처벌재판소 검찰차장을, 4.19혁명 직후에는 대통령권한대행을 지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천의 근·현대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일일이 관련자료와 인물, 사건을 나열할 수 없을 정도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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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선(高禧璇)
1. 기본사항인물카드가 3장 있으며, 세 장의 내용을 종합할 때 본적지, 출생지, 거주지는 모두 仁川府 外里 16번지임. 1903년 5월 6일 생으로, 키는 163cm 가량임. 한국근현대인물자료에 따르면 부친은 高永鎭, 모친은 康氏, 부인은 李仲玉이며 1922년 4월 京城私立高等普通學校를 졸업했음. 2. 주요행적①1928년 8월 8일 경기도 경찰부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지문번호 96776/25999) ②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30년 6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같은 해 8월 22일 출감 ③조선일보 기자였던 1932년 3월 11일경 동대문서사건으로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4월 5일 사진을 촬영하였으나, 구체적인 경과는 조사가 필요함. 이 사진 뒷면에 있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30년 6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것은 ②의 내용을 옮겨적은 것임. 3. 관련인물강복양, 이두옥, 최진하, 유두희, 조준상 4. 기타사항《仁川昔今》의 저자로 잘 알려진 高逸 선생임. 1926년 2월 25일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인천 富豪 최응삼의 丙辰防疫費 기부금 잔금을 둘러싼 문제의 관련자가 재판을 받았으나 같은 해 2월 23일 오후 5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고 함. 이때 같이 재판받은 사람들은 인천 소년군단장 곽상훈, 시대일보 인천지국장 안기성, 시대일보 기자 고희선, 무산자신문 인천지국장 유두희, 인천노총 집행위원 강복양임. 1930년 3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관계자로서 인천의 유두희, 조준상과 함께 재판받음. 1932년 비밀결사 반제동맹 사건 관계로 인천에 내려온 동대문서 형사대에 의해 2월 25일 오후 조준상과 함께 체포됨. 1938년 3월 1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인천청년단연합회가 친일적 성격의 시국강연회를 인천공회당에서 3월 28일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군사연맹 부회장 向井, 인천지검 검사 大珂와 함께 지역유지 고희선이 연사로 결정되었다고 함.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에서 기자로서 재직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인천시립박물관장, 인천시사편찬위원 등으로 지역사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함. 5. 관련자료〈한국근현대인물자료〉에 항목 있음. 京鍾警高秘 제2755호 / 전조선기자대회의 건(1925년 04월 17일), 동아일보 1924.1.16. 제물포靑年會, 시대일보 1924년 10월 23일 미기尾崎行雄씨의 강연을 듣고, 시대일보 1924년 10월 24일 미기尾崎行雄씨의 강연을 듣고, 시대일보 1925년 1월 22일 레닌 추도 금지, 인천서에서, 매일신보 1926년 2월 25일 郭尙勳氏等 起訴猶豫 모다, 중앙일보 1932년 3월 11일 동대문서사건, 매일신보 1930년 3월 23일 第四次朝鮮共產黨 朴慶鎬事件, 매일신보 1932년 2월 27일 비밀결사 반제동맹 사건, 매일신보 1938년 3월 1일 인천청년단 강습회. 6. 비고高逸,《仁川昔今》(選民出版社, 1979), 295~298쪽 自敍. 조우성,《인천이야기 100장면》(도서출판 인아트, 2004), 251~253쪽. 관련 자료가 풍부하고, 광복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