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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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루 사진자료
조선 숙종 때인 1619년부터 1692년까지 강화도 동쪽 해안에 외성을 쌓고 나루가 있는 6곳에 각각 문루를 설치하였다. 진해루는 강화외성에 설치한 문루 중의 하나로, 갑곶나루와 연결되어 있다. 강화군은 2020년 11월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 사이에 진해루를 복원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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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동교회 사진자료
중화동교회는 1898년 10월 9일 창립된 백령도 최고(最古)의 개신교 예배당이다.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에 이어 한국인들이 스스로 세운 교회로는 두 번째이다. 소래교회가 의주 출신의 인삼 장수 서상륜(徐相崙, 1848~1926)이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들을 만나 개종한 후 동생과 함께 세운 교회라면, 중화동교회는 선교사와의 만남이 전혀 없었던 상태에서 개인이나 일가족도 아닌 마을 주민 전체가 집단으로 입교를 결심하고 세웠다는 점이 특징이다. 교회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70세의 노인이었던 선비 허득(許得, 1828~1902)이다. 그는 1894년 가을 황해도에서 동학농민군이 흥기하였을 때 관군을 지원하러 장연에 갔다가, 소래교회가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보호를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개신교를 향한 그의 긍정적 관심은 1897년 말 백령도에 유배된 김성진(金聲振)과의 교류를 통하여 더욱 고무되었다. 김성진은 1897년 경무청 총순 송진용(宋鎭用), 시강원 시독 홍현철(洪顯哲) 등과 함께 정부 전복을 꾀하다가 붙잡힌 인물로, 감리교 신자였던 조카에게 받은 한문 성서를 들고 백령도에 왔던 것이다. 소래교회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허득과 수도에서 활동하며 서구 문명을 경험한 김성진은 곧 교회 설립을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1898년 9월 두 사람은 중화동 주민들을 모아 개신교를 받아들이자고 설득하였고, 주민들의 동의를 얻은 후 소래교회의 지도자 서경조(徐景祚, 1852∼1938)(서상륜의 동생)를 찾아가 교회 설립의 뜻을 알리고 백령도 방문을 부탁하였다. 『백령중화동교회백년사』(1996)에 따르면 전도인을 초빙하고 서적도 구입하기 위하여 김달삼을 선정하였으며, 원래는 서울에 보내려 했으나 소래에 가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래에 보낸 것이라고 한다.10월 9일 중화동 서당에서 중화동 주민들과 서경조를 위시한 소래교회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중화동교회 창립 예배가 거행되었다. 얼마 후 주민 5명이 면화를 구매하기 위하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몰사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큰 위기를 맞았으나, 이듬해 10월 1일 예배당 입당과 함께 거의 모든 주민들이 교회로 복귀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지역 유지의 증언에 따르면 예배당이 세워진 곳은 원래 당제를 지내던 곳이었다고 하며, 이후 같은 자리에서 1923년, 1940년, 1953년, 1969년 개축을 거듭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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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교동교회 사진자료
원래 읍내리에 있었던 교동읍교회였다. 교동읍교회는 인사리의 황씨 집안, 서한리의 방씨 집안, 상용리의 박씨 집안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어 사랑방 선교, 우물가 선교, 교육 선교 등을 통해 교세가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1901년부터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자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또한 서한리와 인사리는 읍내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여서 1904년에는 각각 독립된 예배당을 마련하여 서한리 교회와 인사리 교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교인 수는 꾸준히 늘어났는데 특히 강화민중봉기사건으로 교인수가 크게 늘었으며 1914년과 1921년에 벌어진 대규모 사경회와 부흥회를 통해 교회가 팽창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교동도에서 감리교의 교세가 약화되기 시작하여 1933년 교동읍교회는 읍내리에서 현재 위치인 상용리로 이전하게 된다. 여기에는 성공회의 급격한 성장과 읍내리의 교인 숫자 감소가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후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교동도의 모교회(母敎會)로서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현재 교동교회는 교동면 상용리에 위치하며 본당 옆에 종탑이 있다. 지금도 교회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이며 주변에 교동교회에 대해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없으며 다만 앞에 송암 박두성 생가터에 대한 안내판이 있을 뿐이다.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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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형택지 사진자료
조선 중기의 무신인 황형(黃衡, 1459-1520)의 집터이다. 황형의 본관은 창영이며, 성종 11년(1480)에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도정, 의주목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중종 5년(1510)에 발생한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있으면서 공을 세웠으며, 중종 7년(1512)에 함경도 지방의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이를 진압하였다. 황형이 만년에 강화도 월곶리(月串里)로 낙향하자, 왕이 황형의 공을 인정하며 택지 위에 연미정을 지어 하사하였다고 한다. 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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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산성 사진자료
강화군 향토유적 제30호로, 교동도(喬桐島)에서 제일 높은 화개산(華蓋山, 해발 259m) 정상부부터 북쪽으로 축조된 전체 둘레 2,096m에 이르는 내·외성을 갖춘 포곡식 산성이며, ‘고구리산성’으로도 불린다. 화개산 북쪽으로는 고구저수지와 고읍성이 내려다보이며 시계가 좋으면 황해도 지방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또한, 동쪽으로는 강화도의 별립산과 봉천산, 남쪽과 서쪽으로는 삼산면 대부분의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개산성은 삼국~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개산성의 초축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즉위년(1418)에 ‘강화 교동산성 및 광주 일장성’을 수축할 것을 청하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그 이전에 화개산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국조문헌(國朝文獻)』에는 명종 10년(1555) 최제운이 증축하면서 성안에 군량고를 두었으며, 선조 24년(1591)에 이여양(李汝讓)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였고, 영조 13년(1737)에 개축하여 군창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화개산성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일부 파괴된 구간을 제외하면 대체로 남-북이 세장(細長)하게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난 2000년에 산성의 성벽 및 내부 구조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내성의 서암문과 추정건물지, 외성 북동쪽에 추정 건물지 1기만 조사되었을 뿐 그 외 내성 및 내성의 북문·동문·서문 등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명확한 근거가 제시된 바 없다. 이후 화개산성에 대한 현황을 실측한(2015년) 결과 전체 길이 2,096m 중 내성 둘레 999m, 외성 둘레 1,097m로 파악되었다.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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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택지 사진자료
조선 중기의 문신인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의 집터이다. 홍익한은 본관은 남양이며, 인조 2년(1624)에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장령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나라에 붙잡혀가 피살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등이 있다.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며, 본래 있던 택지비는 1963년에 파손되었다고 한다. 주변에 석재들이 많이 흩어져 있지만, 집터와 관련된 것인지 확인되진 않았다.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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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대사 부도 사진자료
『속수증보강도지』에 의하면 함허(涵虛) 대사는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의 강화도 정수사로 와서 도를 닦았다고 한다. 이러한 함허대사는 강화도에 자신의 헌호인 함허와 관련된 지명들을 남기게 된다. 예를 들면, 지금은 캠핑장으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함허대사가 시통력을 얻는 도를 연마한 곳이라 입구에 ‘함허동천’이라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함허동천’이 있고, 함허동천과 정수동의 입구에서 발원한 ‘함허천’ 등이 있다. 이러한 함허대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곳이 함허대사 부도이다. 함허대사 부도는 정수사 사역안에서 동북쪽 산능선 정상부에 위치한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57㎝이며 상륜부와 옥개석, 탑신부는 돌 하나로 만들었고 탑신괴임은 별도의 돌로 되었고 기단부는 돌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전체는 3개의 돌로 이루어져있다. 기대석은 한 변의 길이가 101㎝이고 높이는 8㎝이고, 기단부와 하대석은 폭이 67㎝, 높이는 19㎝이며, 상대석은 높이가 18.5㎝이고, 탑신괴임은 높이가 38㎝이다. 탑신석의 높이는 16㎝이고 옥개석의 높이는 30㎝, 폭은 53㎝이다. 상륜부의 높이는 30.3㎝이다.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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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외가묘 사진자료
철종외가 인근에 위치한 철종외가 묘이다. 철종의 외숙인 염성화, 염덕석, 염상임 3인의 묘가 있다. 철종 10년(1859)에 강화유수 조충식이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묘역을 정비한 후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철종의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로, 용담(龍潭) 염씨 집안 사람이었다. 철종 때 본관이 파평(坡平)인 염종수란 이가 자신을 철종의 외척이라고 속이기 위해 묘표에 새긴 ‘용담’을 파내고 ‘파평’을 넣으려다가 발각된 사건이 있었다. 염종수는 이 일로 참수를 당했고, 철종은 생모 염씨의 작위를 영원 부대부인에서 용성 부대부인으로 고쳤다. 철종의 외가인 용담 염씨는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염형명을 시조로 한다. 그 후손인 염흥방이 이인임 등에게 숙청을 당했는데, 그 후 염흥방의 자손들이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용담리로 피신하면서 용담 염씨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