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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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진호적(1867)
조선시대의 호적 작성 절차를 보면, 간지가 자(子)·묘(卯)·오(午)·유(酉)에 해당하는 식년(式年), 즉 3년마다 호적을 만들 때 각 가호의 대표자인 호수(戶首)가 일정한 양식에 따라서 주소와 함께 본인 및 처, 본인과 처의 4조(四祖: 부・조부・증조부・외조부), 그리고 호의 구성원(친족과 소유 노비 등) 등의 성명・직역·연령 등을 기록한 문서 2통을 관아에 제출하도록 하였는데, 그 문서를 호구단자라고 한다. 관아에서는 그 제출된 호구단자의 내용을 3년 전에 작성된 호적과 대조・확인한 다음 한 통은 새 호적을 만들기 위한 자료로 관아에 보관하고, 나머지 한 통은 호수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관아에서는 보관한 호구단자 한 통을 바탕으로 호적을 몇 부 작성하여 해당 고을에 한 부 보관하고, 나머지는 감영과 서울(호조 및 한성부)에 보내 호정(戶政) 자료로 활용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호적 자료는 행정관아(면 및 고을)에서만 작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와 섬 지역에 내륙 고을의 행정 관할로부터 벗어난 독립적인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되면서 수군의 우두머리가 직접 호구조사를 하여 신역(身役)을 수취하는 체제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수군 독진(獨鎭)이 설치된 자연도(紫燕島. 현 영종도)의 주민을 호구조사하여 작성한 자료 중 하나가 바로 “1867년 영종진 호적”이다. 이 자료는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자료의 정식 명칭은 “同治六年正月 日永宗防營今丁卯式帳籍冊”이다. 분량은 1책 93면으로 되어 있다. 자료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자료는 ‘동치 6년(同治六年)’ 즉 1867년(고종 4・丁卯) ‘영종방어영(永宗防禦營)’에서 호구조사를 시행한 후 성책한 호구장적(戶口帳籍)이다. 자료에는 당시 영종방어영의 관할인 영하면(營下面)・전소면(前所面)・후소면(後所面: 이상, 영종도)과 삼목면(三木面: 삼목도), 용유면(龍流面: 용유도) 등, 5개 지역(면)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주민들의 인적 사항을 기재하고 있다. 자료에서 확인되는 주민수는 총 908戶에 2,781명(남성 1,552명・여성 1,229명)이다. 한편, 자료에 등재된 마지막 가호인 용유면 제42통 제2호 다음에 각 면별 호・구수(구의 경우 남녀별, 연령층별)와 직역별 인구수 등을 집계한 ‘도이상(都已上)’조가 수록되어 있다. 끝으로, 본문의 마지막 면인 제91면에는 영종진의 수장인 방어사(防禦使: 수군을 통솔하던 종2품의 무관직)의 수결(手決: 오늘날의 서명)과, 그 아래에 호적 작성 및 성책을 관장한 감관(監官)과 이정(厘正), 색리(色吏) 등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사진 3] 참조). 이 호적대장이 1867년 정월에 성책된 것이므로 당시 방어사가 신효철(申孝哲)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본 영종진 호적에서 감관 장호연(張昊淵)은 전소면 제36통 제3호, 두 명의 색리 김창건(金昌鍵)과 김원식(金元植)은 영하면의 제3통 제5호와 제4통 제1호의 호수로 확인된다. 그렇지만, 이정으로 기재된 김도상(金道尙)과 최홍식(崔弘植), 김금선(金今先) 세 명은 본 호적 자료에서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색리가 작성한 호적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임무였기에 외지인이 파견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들 이정 세 명은 영종진을 관할한 어영청(御營廳)의 서리였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러면 국내에 남아 있어야 할 이 호적 자료가 어떻게 일본 내, 그것도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동경국립박물관에서 이 자료의 소장 경위를 기록하고 있지 않아 그 사정을 전혀 알 방법이 없다. 그런데 1875년 이른바 ‘운양호사건’ 때 영종진이 일본군에 의해 분탕되었고, 이때 일본군이 대포・소총 등의 무기류와 함께 병서(兵書)・영종성(永宗城) 도면(圖面) 등의 전적류를 전리품으로 탈취하여 갔다고 한다. 바로 영종진 분탕 8년 전에 작성되어 영종진 내에 보관하고 있던 “1867년 영종진 호적”이 이 전적류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하튼 이 자료가 인천지역 사회, 그리고 지역사 연구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 이러한 평가를 하는 까닭은 첫째, 조선시대에 작성된 인천지역의 호적대장으로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인천지역의 호적 자료는 서울대학교의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광무(光武) 년간의 ‘신식호적(新式戶籍)’ 2책(1898년에 작성된 답동과 축현외동의 호적책)과, 여러 기관 및 개별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준호구와 호구단자)들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둘째, 수군진이 설치된 섬 지역의 호적 자료로는 1876년에 작성된 전라도 청산도(靑山島)의 “靑山鎭丙子戶籍大帳”과 함께 본 영종진 호적 두 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천문화유산센터에서 DB로 소개하는 ‘1867년 영종진 호적’은 조선시대의 인천지역, 특히 인천 앞 섬 지역에서 거주하였던 주민들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출전 : 임학성, <인천호적자료DB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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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루 사진자료
조선 숙종 때인 1619년부터 1692년까지 강화도 동쪽 해안에 외성을 쌓고 나루가 있는 6곳에 각각 문루를 설치하였다. 진해루는 강화외성에 설치한 문루 중의 하나로, 갑곶나루와 연결되어 있다. 강화군은 2020년 11월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 사이에 진해루를 복원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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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동교회 사진자료
중화동교회는 1898년 10월 9일 창립된 백령도 최고(最古)의 개신교 예배당이다. 황해도 장연의 소래교회에 이어 한국인들이 스스로 세운 교회로는 두 번째이다. 소래교회가 의주 출신의 인삼 장수 서상륜(徐相崙, 1848~1926)이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들을 만나 개종한 후 동생과 함께 세운 교회라면, 중화동교회는 선교사와의 만남이 전혀 없었던 상태에서 개인이나 일가족도 아닌 마을 주민 전체가 집단으로 입교를 결심하고 세웠다는 점이 특징이다. 교회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70세의 노인이었던 선비 허득(許得, 1828~1902)이다. 그는 1894년 가을 황해도에서 동학농민군이 흥기하였을 때 관군을 지원하러 장연에 갔다가, 소래교회가 동학농민군의 공격을 받지 않고 오히려 보호를 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개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개신교를 향한 그의 긍정적 관심은 1897년 말 백령도에 유배된 김성진(金聲振)과의 교류를 통하여 더욱 고무되었다. 김성진은 1897년 경무청 총순 송진용(宋鎭用), 시강원 시독 홍현철(洪顯哲) 등과 함께 정부 전복을 꾀하다가 붙잡힌 인물로, 감리교 신자였던 조카에게 받은 한문 성서를 들고 백령도에 왔던 것이다. 소래교회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허득과 수도에서 활동하며 서구 문명을 경험한 김성진은 곧 교회 설립을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1898년 9월 두 사람은 중화동 주민들을 모아 개신교를 받아들이자고 설득하였고, 주민들의 동의를 얻은 후 소래교회의 지도자 서경조(徐景祚, 1852∼1938)(서상륜의 동생)를 찾아가 교회 설립의 뜻을 알리고 백령도 방문을 부탁하였다. 『백령중화동교회백년사』(1996)에 따르면 전도인을 초빙하고 서적도 구입하기 위하여 김달삼을 선정하였으며, 원래는 서울에 보내려 했으나 소래에 가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소래에 보낸 것이라고 한다.10월 9일 중화동 서당에서 중화동 주민들과 서경조를 위시한 소래교회 신자들이 모인 가운데 중화동교회 창립 예배가 거행되었다. 얼마 후 주민 5명이 면화를 구매하기 위하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몰사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큰 위기를 맞았으나, 이듬해 10월 1일 예배당 입당과 함께 거의 모든 주민들이 교회로 복귀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지역 유지의 증언에 따르면 예배당이 세워진 곳은 원래 당제를 지내던 곳이었다고 하며, 이후 같은 자리에서 1923년, 1940년, 1953년, 1969년 개축을 거듭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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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교동교회 사진자료
원래 읍내리에 있었던 교동읍교회였다. 교동읍교회는 인사리의 황씨 집안, 서한리의 방씨 집안, 상용리의 박씨 집안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어 사랑방 선교, 우물가 선교, 교육 선교 등을 통해 교세가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1901년부터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자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또한 서한리와 인사리는 읍내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여서 1904년에는 각각 독립된 예배당을 마련하여 서한리 교회와 인사리 교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교인 수는 꾸준히 늘어났는데 특히 강화민중봉기사건으로 교인수가 크게 늘었으며 1914년과 1921년에 벌어진 대규모 사경회와 부흥회를 통해 교회가 팽창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부터 교동도에서 감리교의 교세가 약화되기 시작하여 1933년 교동읍교회는 읍내리에서 현재 위치인 상용리로 이전하게 된다. 여기에는 성공회의 급격한 성장과 읍내리의 교인 숫자 감소가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후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여 교동도의 모교회(母敎會)로서의 위치를 찾게 되었다. 현재 교동교회는 교동면 상용리에 위치하며 본당 옆에 종탑이 있다. 지금도 교회로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이며 주변에 교동교회에 대해 설명해주는 안내판이 없으며 다만 앞에 송암 박두성 생가터에 대한 안내판이 있을 뿐이다.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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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형택지 사진자료
조선 중기의 무신인 황형(黃衡, 1459-1520)의 집터이다. 황형의 본관은 창영이며, 성종 11년(1480)에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도정, 의주목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중종 5년(1510)에 발생한 삼포왜란 때 전라좌도방어사로 있으면서 공을 세웠으며, 중종 7년(1512)에 함경도 지방의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이를 진압하였다. 황형이 만년에 강화도 월곶리(月串里)로 낙향하자, 왕이 황형의 공을 인정하며 택지 위에 연미정을 지어 하사하였다고 한다. 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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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개산성 사진자료
강화군 향토유적 제30호로, 교동도(喬桐島)에서 제일 높은 화개산(華蓋山, 해발 259m) 정상부부터 북쪽으로 축조된 전체 둘레 2,096m에 이르는 내·외성을 갖춘 포곡식 산성이며, ‘고구리산성’으로도 불린다. 화개산 북쪽으로는 고구저수지와 고읍성이 내려다보이며 시계가 좋으면 황해도 지방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또한, 동쪽으로는 강화도의 별립산과 봉천산, 남쪽과 서쪽으로는 삼산면 대부분의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화개산성은 삼국~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개산성의 초축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즉위년(1418)에 ‘강화 교동산성 및 광주 일장성’을 수축할 것을 청하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그 이전에 화개산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국조문헌(國朝文獻)』에는 명종 10년(1555) 최제운이 증축하면서 성안에 군량고를 두었으며, 선조 24년(1591)에 이여양(李汝讓)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였고, 영조 13년(1737)에 개축하여 군창을 두었다고 되어 있다. 화개산성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일부 파괴된 구간을 제외하면 대체로 남-북이 세장(細長)하게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지난 2000년에 산성의 성벽 및 내부 구조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내성의 서암문과 추정건물지, 외성 북동쪽에 추정 건물지 1기만 조사되었을 뿐 그 외 내성 및 내성의 북문·동문·서문 등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아 명확한 근거가 제시된 바 없다. 이후 화개산성에 대한 현황을 실측한(2015년) 결과 전체 길이 2,096m 중 내성 둘레 999m, 외성 둘레 1,097m로 파악되었다.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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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 택지 사진자료
조선 중기의 문신인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의 집터이다. 홍익한은 본관은 남양이며, 인조 2년(1624)에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장령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오달제, 윤집 등과 함께 청나라에 붙잡혀가 피살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 등이 있다. 건물은 남아 있지 않으며, 본래 있던 택지비는 1963년에 파손되었다고 한다. 주변에 석재들이 많이 흩어져 있지만, 집터와 관련된 것인지 확인되진 않았다.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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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대사 부도 사진자료
『속수증보강도지』에 의하면 함허(涵虛) 대사는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의 강화도 정수사로 와서 도를 닦았다고 한다. 이러한 함허대사는 강화도에 자신의 헌호인 함허와 관련된 지명들을 남기게 된다. 예를 들면, 지금은 캠핑장으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함허대사가 시통력을 얻는 도를 연마한 곳이라 입구에 ‘함허동천’이라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함허동천’이 있고, 함허동천과 정수동의 입구에서 발원한 ‘함허천’ 등이 있다. 이러한 함허대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곳이 함허대사 부도이다. 함허대사 부도는 정수사 사역안에서 동북쪽 산능선 정상부에 위치한다. 부도의 전체 높이는 157㎝이며 상륜부와 옥개석, 탑신부는 돌 하나로 만들었고 탑신괴임은 별도의 돌로 되었고 기단부는 돌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전체는 3개의 돌로 이루어져있다. 기대석은 한 변의 길이가 101㎝이고 높이는 8㎝이고, 기단부와 하대석은 폭이 67㎝, 높이는 19㎝이며, 상대석은 높이가 18.5㎝이고, 탑신괴임은 높이가 38㎝이다. 탑신석의 높이는 16㎝이고 옥개석의 높이는 30㎝, 폭은 53㎝이다. 상륜부의 높이는 30.3㎝이다.출처 : 인하대학교박물관·인천문화유산센터, 『2021 인천 역사자료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 사업 –인천 문화유산 자료 종합 아카이브 보고서(강화·옹진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