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역사 기초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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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개성의 역사
【목차】 º 개설 º 고려건국 이전의 개성 º 고려시대의 개경 º 조선시대의 개성 º 근대 이후의 개성 【개설】 개성은 신라후기까지는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으나 898년부터 905년까지 후고구려의 수도였다. 919년 수도로 정해진 후 강화천도기를 빼고는 줄곧 고려왕조의 수도였다. 조선건국후에도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그리고 1399년 잠시 개경으로 환도하였던 시기에 조선의 수도였다. 1405년(태종 5) 10월 조선왕조가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고, 1438년(세종 20) 개성유후사가 개성부로 개편되면서 개성은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유수부로 그 위상이 정해졌다. 2003년에는 황해북도로 편입되었고 개성특급시에는 개풍군과 장풍군(長豊郡)이 포함되어있다. 【고려건국 이전의 개성】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이 된 송악군 일대는 신라후기까지는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개경은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인데, 신라 때 송악군(松嶽郡)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694년(신라 효소왕 3)에는 이곳에 성을 쌓았다고한다. 한편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된 김관의(金寬毅)가 쓴 『편년통록(編年通錄)』에 따르면 오관산(五冠山) 마하갑(摩訶岬)에 살던 강충(康忠)이 풍수에 밝았던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의 조언에 따라 부소산(扶蘇山, 송악산) 북쪽에 있던 부소군(扶蘇郡)을 산 남쪽으로 옮기고 산에 소나무를 심어 고을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것은 신라후기 송악군의 중심이 오관산 남쪽에서 송악산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왕건의 선조들은 예성강과 송악산 일대의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였고, 특히 태조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은 이 지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송악군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898년 궁예(弓裔)가 송악군을 수도로 삼으면서부터이다. 즉 송악군의 사찬(沙粲)이었던 태조의 아버지 왕륭(王隆, 世祖)은 896년 송악군을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는 태조에게 이곳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게 하고 898년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이후 송악군은 한 나라의 수도로서 국가운영에 필요한 성곽, 궁궐, 관청, 도로 등 시설들을 갖추게 되었다. 905년 궁예가 수도를 철원(鐵圓)으로 옮기면서 송악은 수도의 위상을 오래 유지하지 못했지만, 이 기반은 고려 건국 후 개경으로 이어졌다. 【고려시대의 개경】 태조는 고려를 건국한 다음해인 919년 송악산의 남쪽, 곧 송악군을 수도로 정하여 개주(開州)라 하고 궁궐을 창건하였으며, 이어서 시전(市廛)을 세우고 방리(坊里)를 가리어 5부(五部)로 나누었으며, 법왕사(法王寺) 등 10개의 절을 지었다. 이 때 성곽, 관청, 시전, 도로, 절 등 국가운영에 필요한 주요 시설들이 갖추어지면서 개경은 비로소 한 나라 수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때 개경의 기본 시설은 후고구려 때의 것이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수도 개경은 명실상부한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개경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 교통, 문화의 중심지로 바뀌어 갔고, 모든 길은 개경으로 통하였으며, 나라의 물산 또한 개경으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태조 때 개경이 수도의 면모를 모두 갖춘 것은 아니었다. 개경은 광종, 성종, 현종 때를 거치면서 영역을 확정하고 주요 시설들을 확충하면서 수도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960년(광종 11)에는 개경의 이름을 황도(皇都)로 고치고 궁궐을 수리하였다. 성종 초에는 정치제도를 고치면서 관청을 정비하였으며, 986년(성종 5)에는 5부방리(五部坊里)를 고쳤고, 991년에는 사직(社稷)을 건립하였으며, 992년에는 태묘(太廟, 종묘)를 완성하였다. 1010년(현종 원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태묘와 궁궐 등 개경의 주요 시설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파괴된 시설을 재건하는 한편, 1024년(현종 15)에는 5부방리제를 개편하였고, 1029년(현종 20)에는 나성(羅城) 축조를 마무리 하였다. 나성(羅城) 축성에 따라 개경의 영역이 정비되어 5부방리의 개편이 필요했다. 이로써 기본 영역이 확정되고 내부의 행정이 정비되었다. 개경 5부에는 사(使), 부사(副使), 녹사(綠事) 등이 설치되어 개경의 행정을 맡았다. 인종 초 이자겸의 난과 명종 초의 화재로 궁궐이 불에 타 다시 짓는 과정이 이어지지만, 1232년(고종 19) 몽골과 전쟁 중에 수도를 강화로 옮기기까지 개경의 기본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1232년부터 개경으로 환도하는 1270년까지 개경은 수도의 자리를 강화에 내주었으며, 이 때 성곽, 궁궐, 관청, 절 등 개경의 주요 시설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1270년(원종 11) 개경으로 환도 후 주요 시설을 재건하였지만 고려전기의 모습을 그대로 복구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995년(성종 14) 전국의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개성부(開城府)를 설치하고, 개경을 보위하는 지역인 적현(赤縣)과 기현(畿縣)을 두었다. 1018년(현종 9) 지방제도를 ‘주현속현제도’로 개편할 때 개성부를 혁파하고 적현과 기현은 개성현과 장단현을 주현(主縣)으로 하는 행정편제가 이루어져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이 직접 통치하게 하고, 이 지역을 ‘경기(京畿)’라 하였다. 이후 이 영역은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가 관할하는 개성부로 통합하여 수도 개경을 지원하는 경기지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1308년 충선왕(忠宣王)이 복위한 후 경기영역의 행정을 맡았던 개성부에 5부와 급전도감(給田都監)을 병합하였다. 이 때 개성부에는 판부윤(判府尹) 1명(종 2품), 윤(尹) 2명(1명은 겸직, 정 3품), 소윤(少尹) 3명(1명은 兼官, 정 4품), 판관(判官) 2명(정 5품), 기실참군(記室參軍) 2명(정 7품)을 두고, 품질에 따라 선공사(繕工司)의 직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따로 개성현령을 두어 도성 밖을 맡겼다. 이후 개성부는 도성인 개경 5부와 그 바깥인 ‘경기영역’의 행정을 총괄하는 관청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 설치한 개성부는 개경 외곽의 적현과 기현을 관할하기 위한 관부였고, 1062년(문종 16)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가 파견된 개성부는 경기 13현을 관할하는 지방 관부였다. 따라서 충선왕 복위년 이후 개성부는 본격적으로 수도 개경의 행정을 맡게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2차 침입 때 공민왕이 개경을 적에게 내어주고 복주목(福州牧, 안동부)까지 피난간 일은 개경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이 때 궁궐을 비롯한 개경의 주요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특히 그 때 불에 탄 송악산 남쪽의 본궐[本闕]은 이후 복구되지 못하였다. 개경은 고려 말 잦은 천도 논의 속에서 우왕 때와 공양왕 때 일시적으로 남경(南京, 한양)에 수도 자리를 내준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고려왕조의 수도로서 위상을 지켰다. 【조선시대의 개성】 1392년 7월 조선의 태조는 개경 중심부에 있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는데, 그가 1394년 10월에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길 때까지 개경은 여전히 조선의 수도였다. 이 때 개경의 행정을 맡은 개성부는 1308년 고려 충선왕이 복위하여 개편한 개성부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조선 태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한양부(漢陽府)는 한성부(漢城府)로 개편되어 수도의 행정을 맡게 되었고 개성부는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로 개편되어 개성의 행정을 맡게 되었다. 1399년(정종 원) 3월에 왕이 수도를 개성으로 다시 옮기면서 개경은 수도의 위상을 회복하고, 개성유후사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개성은 수도의 지위를 완전하게 회복하지 못한 채 여전히 유후사체제를 유지하였다. 1405년(태종 5) 10월 조선왕조가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기고, 1438년(세종 20) 개성유후사가 개성부로 개편되면서 개성은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유수부(留守府)로 그 위상이 정해졌다. 이후 개성부의 위상은 한성부와 분명히 구분되었다. 조선 초기 개성부의 위상은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곧 경관직 종2품아문으로 정2품아문인 한성부보다 한 단계 낮았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개성부의 관원은 종 2품의 유수(留守) 2명, 종 4품의 경력(經歷) 1명, 종 6품의 교수(敎授) 1명이었다. 개성 유수 중 1명은 경기관찰사를 겸하게 되면서 한성부는 오로지 수도 한성부의 행정만 맡게 되었다. 이것은 개성부가 수도인 한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기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후 개성 유수직은 외관직으로 바뀌어 임명되기도 했지만 1469년(예종 1) 경관직으로 확정되었다. 조선 건국 후 개성은 수도에서 지방도시로 전락했지만, 개성은 상업도시로서, 수도의 뒤를 지키는 군사도시로서, 사신 왕래가 빈번한 교통의 요지로서 그 위상을 지켜나갔다. 조선시대에는 개경의 위상이 변화했을 뿐 아니라 영역도 변화하였다. 1394년 조선왕조의 수도가 한양으로 옮길 때 개경은 개성유후사가 되는데, 이후인 1398년(태조 7) 개경 서쪽의 개성현(開城縣)이 혁파되어 개성유후사에 병합되면서 조선시대 개성부의 기본 영역이 확정되었다. 개성부 남쪽의 정주(貞州)는 1413년(태종 13) 개성유후사에 병합되었다가 1418년(태종 18)에 해풍군(海豊郡)으로 복구되었으며, 1442년(세종 24) 해풍군은 덕수현과 병합하여 풍덕군(豊德郡)이 되었다. 1796년(정조 20) 금천군의 대남면(大南面)과 소남면(小南面), 장단부의 사천면(沙川面)이 개성부로 이속되면서 개성부의 북쪽과 동남쪽의 영역이 확대되었고, 1823년(순조 23) 남쪽의 풍덕군이 개성부에 병합되면서 개성부의 영역이 조강(祖江, 한강)까지 확대되었다. 【근대이후의 개성】 1895년 2차 갑오개혁 때 군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관찰부)와 337군으로 개편하였는데 개성부는 1896년 개성관찰부(開城觀察府)로 개편되었다가 곧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1906년에는 개성부가 혁파되고 개성군이 되었고, 1914년에는 개성군에 풍덕군이 통합되면서 이전 개성의 중심부는 송도면(松都面)이 되었다. 1930년에는 송도면의 중심부는 개성부로 개편되고, 송도면의 나머지 지역과 주변의 면들이 풍덕군에 통합되어 개풍군(開豊郡)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남한에 소속되었던 개성부는 개성시로 개편되었는데, 한국전쟁 후 북한에 소속되었다. 1955년 1월 황해북도 개풍군과 판문군(板門郡)이 개성시에 소속되었고, 1957년 6월에 개성지구가 도급인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개성직할시는 개성시, 개풍군, 판문군으로 구성되었고, 1960년 3월에 황해북도 장풍군이 개성시에 편입되었다. 2003년에는 개성직할시가 황해북도에 편입되었고, 명칭이 개성특급시로 변경되었으며, 개풍군과 장풍군(長豊郡)이 분리되었다. 이때 개성특급시 일부와 옛 판문군 일부를 합쳐 개성공업지구를 신설하였다. 2005년 9월에는 개풍군을 폐지하고 개성특급시에 편입하였다. 2019년 10월에는 개성특급시를 황해북도에서 분리하여 개성특별시로 승격하였고, 2020년에는 옛 개풍군 지역과 판문군 지역을 개풍구역과 판문구역으로 복구하였다. 고려시기 개경과 경기 일대는 현재 개성특별시(개풍구역과 판문구역 포함)와 황해북도 장풍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 6.15선언 이후 개성지역에서는 남북공동사업으로 개성공단의 설치, 개성관광,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개성공단은 2000년 8월 현대아산과 북측이 남북의 화해 협력과 동질성 회복을 위해서 개성공단 설치에 대한 합의서에 따라 2004년 가동되어 2016년 2월 폐쇄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또한 2005년 7월 현대아산과 북측이 개성관광을 합의하고, 그 해 8월 세 차례의 시범관광을 실시하였고, 2007년 12월 5일부터 본 관광이 시작하였다. 큰 인기를 얻었던 개성관광은 남북관계가 나빠지면서 2008년 11월 29일 중단되었다. 이와 함께 만월대 남북공동발굴조사가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진행되었다. 모두 8차례에 걸쳐서 시굴조사, 발굴조사, 복구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고려 궁궐의 구조를 탐구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를 확보하였다. 2013년에는 개성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개경의 궁궐
【목차】 º 개설 º 본궐 º 개경 내외의 이궁 【개설】 왕건은 919년 철원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송악 남쪽에 궁궐을 건축하였는데, 이것이 본궐이다. 고려세계에서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가 도선(道詵)의 말에 따라 송악 남쪽으로 옮겨 지은 집터이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 본궐은 법궁으로서 정치와 국가 의례가 펼쳐지는 중심 장소였다. 개경 내외에는 본궐 외에도 여러 이궁들이 건설되고 운영되었다. 【본궐】 개경은 서북쪽의 송악을 주산으로 하고 오공산(서), 용수산(남)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한다. 분지 안에도 자남산(송악의 동남쪽) 등의 산과 구릉이 있으며, 주변 산에서 나온 물이 중앙에 모여 동남쪽으로 흘러나가는 형세를 지니고 있다. 왕건은 분지의 서북쪽으로 치우친 송악 아래 구릉지에 본궐을 건설하였다. 고려 법궁은 일반적으로 ‘만월대(滿月臺)’라 칭해지는데, 이는 이미 폐허로 변한 14, 15세기에 들어와 붙여진 이름이다. 이외에 ‘연경궁(延慶宮)’이라는 명칭도 있으나, 이는 다른 이궁의 이름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당대 기록에서는 대내(大內), 금중(禁中) 등으로 불렸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확인할 수 있는 명칭은 ‘본궐(本闕)’이다. 본궐은 전란과 반란, 화재 등으로 소실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창되었다. 중요한 소실 및 중수 시점으로는 총 4번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 현종대 거란 침입 후 중수한 것, 둘째 1126년(인종 4) 이자겸·척준경의 난으로 소실된 후 중수한 것, 셋째 1171년(명종 1) 화재로 소실된 후 중수한 것, 마지막으로 1270년(원종 11) 강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후 중수한 것이다. 강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후 원 간섭기 이후로 본궐은 활용도가 많이 떨어졌고, 이후 공민왕 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또다시 소실되었다. 1380년대 우왕대 이후로는 중건되지 못하였으며, 공양왕대에는 터만 남아 있었다. 시기별로 중심구역이나 구성이 변화하였다고 보이는데, 그중에서도 11세기 현종대 중창되었을 때부터 12세기 중엽까지가 본궐이 고려 법궁으로서의 위상과 기능에 충실한 시기라고 평가되고 있다. 이 시기 본궐은 구릉지를 따라 건축물이 배치된 복잡한 구성을 지니고 있었다. 크게 동쪽의 정전인 회경전(會慶殿)과 서쪽의 정전인 건덕전(乾德殿)을 중심으로 하는 두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원래 태조대 처음 건설된 구역은 건덕전 구역으로 추정되며, 그 동편의 회경전 구역은 현종대 중창되며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회경전 구역에서는 만 명 이상의 승려들에게 식사 보시(布施)를 하는 등 큰 규모의 불교행사나 송나라 사신으로부터 조서를 접대하는 등 상례적이지 않은 행사가 치러졌다. 그에 비해 건덕전 구역은 요, 금의 사신을 접대하거나 가례(嘉禮)와 길례(吉禮)의 중요한 의례들이 펼쳐졌다. 이 영역에는 건덕전 외에도 연등회의 중심공간이었던 강안전(康安殿)과 국왕의 직계 4친의 영정을 모시고 제례를 올렸던 경령전(景靈殿)이 있었다. 한편 팔관회나 군대 사열, 각종 도량과 초제(醮祭) 같은 종교 행사, 격구 같은 행사가 벌어진 곳은 궁궐의 정남문인 승평문(昇平門)부터 회경전 남쪽의 신봉문(神鳳門)에 이르는 구정(毬庭)이었다. 신봉문은 본궐의 여러 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웅장했다고 전해지는데, 누각 형식으로 되어 있어 왕은 문루에서 그 아래 구정에서 벌어지는 행사를 관람하였다. 구정의 규모는 몇 천 명에 달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넓었다. 본궐의 정남문인 승평문은 3문 형식으로 이루어져 웅대하였다. 본궐 안에는 초기부터 내제석원(內帝釋院)과 내천왕사(內天王寺) 등의 절을 두었고, 도교적 행사로 추정되는 초제(醮祭)를 행하는 정사색(淨事色) 등의 건물들도 있었다. 이는 불교와 도교 등 다양한 신앙을 포섭하였던 고려 국가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한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인 좌춘궁(左春宮)은 본궐의 동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동궁의 남쪽이자 구정의 동쪽에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추밀원 등의 관서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 관서들의 고위 관원들인 재신과 추밀은 합좌를 통해 각종 제도와 법, 국방 등의 문제를 결정하였는데 이들 관서들이 같은 공간에 나란히 배치되었다는 점은 정사의 대부분이 궁궐 안에서 결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한 가지 특색은 백관의 규찰과 탄핵을 담당하였던 어사대(御史臺) 역시 이들 공간에 같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어사대와 같은 성격의 관서는 당이나 송에서는 대체로 황성 내지는 황성 밖에 위치하였으나, 고려에서는 궁성 안에 배치되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상과 같은 고려의 궐내각사는 주요 핵심 관서들이 모두 배치됨으로써 국정의 전 과정이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 말부터 폐허가 되기 시작하였던 본궐은 조선시대에도 회경전 터와 그 앞의 계단 정도가 인상적인 장소로 남았을 정도였다. 터가 망가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전쟁 때 미군이 이 자리에 병원을 지으려고 불도저로 밀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본궐은 한 시기에 단일한 계획 하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구릉지에 입지하며 여러 시기를 거쳐 증축이 되어 왔기 때문에 다양한 축에 복잡한 건물군을 구성하였다. 【개경 내외의 이궁】 개경 내외에도 여러 이궁이 있어, 본궐이 불탔을 때 국왕이 임시로 머무는 장소가 되곤 하였다. 또 무신정변으로 쫓겨나기 전 의종은 수많은 별궁과 누정을 지어 유락을 즐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궁의 존폐가 빈번하였고 명칭의 변화도 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30여 년의 강도천도로 단절기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 초부터 말까지 꾸준히 유지되어 활용된 이궁은 거의 확인하기 힘들다.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뒤에 여러 이궁이 활용되거나 새로운 이궁이 건설되었다. 특히 원 간섭기에는 원 출신 공주를 위한 궁궐들이 건설되었던 점과 이궁의 존폐가 매우 빈번하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원 공주를 위해 건설된 궁궐로는 대표적으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위해 건설된 수녕궁(壽寧宮)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대 이궁들은 건설자의 죽음과 함께 철훼되어 다른 궁궐 및 건물의 수리나 사찰로 전환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는 당시의 정치구조와 관련이 깊었다. 원의 간섭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 고려 왕들은 부자 간에도 심한 갈등을 빚곤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새 왕은 전왕이 만든 이궁을 철거해버렸다. 갈등이 심했던 충렬-충선왕대와 충혜-충목왕대에 특히 그러한 양상이 뚜렷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1309년(충선왕 1) 중수된 연경궁(延慶宮)은 이후 철훼되지 않고 규모 큰 이궁으로서 공민왕대 무렵까지 연회 장소로 사용되면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을 거치면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원 간섭기 본궐은 국왕이 임어하는 빈도가 이전 시기에 비해 떨어졌지만 여전히 즉위식이나 규모 큰 의례들이 펼쳐지는 의례장소로 사용되었다. 충선왕대 연경궁 중수 이후에는 본궐과 연경궁 사이에 기능이 분담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연경궁의 위상이 조선 초 본궐의 이름을 연경궁이라고 착각하게 했던 원인의 하나로 추정된다. 1374년(공민왕 22) 중수된 화원(花園)에는 팔각전(八角殿)이 건설되면서 고려 말 조선 초 화려한 장소로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위화도 회군 당시 우왕과 최영 등이 점거했던 장소로서, 15세기 말엽까지도 개성을 방문한 이들의 유람기에서 종종 거론되기도 하였다. 한편 수창궁(壽昌宮)은 고려 전기부터 말까지 비교적 꾸준히 사료에 등장하는 이궁이다. 현종, 인종, 명종 등이 본궐을 중수할 때 이곳에 머무르곤 하였다. 강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한동안 사용이 뜸하다가, 우왕대 중수한 후 조선 초까지 주요한 궁궐로 사용되어,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모두 이 궁에서 즉위하였다. 1418년(태종 18) 태종이 개성에 행차했을 때까지도 수창궁에 임어하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이미 옛 터로 나오고 있어서 세종대를 지나며 원 모습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
개성 사찰
【목차】 ˚ 고려시대 개경의 사찰 ˚ 조선시대 개성의 사찰 【고려시대 개경의 사찰】 고려 건국과 함께 개성 즉 개경에는 사찰이 조성되었다. 신라하대 지방 곳곳에 사찰이 창건되었으므로, 개성 지역에도 사찰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까지 확인되는 것은 없다. 다만 태조가 고려를 건국하고 수도를 개경으로 정한 뒤부터 개성 지역에 본격적으로 사찰이 조성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태조는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국가의 대업을 이루어 나가므로 절을 짓고 나라에서 주지를 파견해야 하며 이와 함께 사원은 도선(道詵)이 정한 바에 따라 절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고려의 절은 원칙적으로는 풍수에 따른 비보사원(裨補寺院)으로서 조성 및 운영되었다. 밀기(密記)에 기록하였다는 70여개의 비보사사 등에서 국가적으로 관리한 비보사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보제사(普濟寺)는 비보설과 관련된 대표적인 개경사원이다. 고려시대 개경의 사찰 건립과 중창은 고려전기, 대몽항쟁기, 원간섭기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고려전기는 개성의 주요사찰 대부분이 조성되었던 시기였다. 개성에 처음 절이 세워진 것은 919년(태조 2)이었다. 수도인 개경에 궁실, 성곽을 지으면서 태조는 법왕사(法王寺), 왕륜사(王輪寺), 내제석원(內帝釋院) 등 10개의 절을 지었다. 이후에도 태조는 재위기간 동안 귀산사(龜山寺), 안화사(安和寺), 개국사(開國寺), 현성사(賢聖寺), 광명사(廣明寺) 등 대략 25여개의 절을 지었다. 고려시대 개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사찰의 다수가 이때 조성되었으며, 대개 궁궐 주변과 송악산 기슭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951년(광종 2) 봉은사(奉恩寺)와 불일사(佛日寺) 창건은 진전사원(眞殿寺院)의 조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이후 현종대 현화사(玄化寺), 문종대 흥왕사(興王寺), 숙종대 국청사(國淸寺), 예종대 대대적으로 중창한 천수사(天壽寺) 등 개경 일대에는 왕실의 원찰이거나 진전사원이 계속 개창되었고, 이러한 절은 그 규모도 장대하였다. 또한 나성이 축조되고 개경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사찰이 조성되는 지역 역시 황성 밖에서 다시 나성 밖 사교(四郊)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개성지역 사찰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무신집권기였다. 무신집권 초기 무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개경 지역 사찰을 중심으로 일어나 무신집정자들과 유혈충돌을 빚기도 했지만, 이 자체가 개경 사찰의 쇠락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신집권기 전개된 몽골과의 전쟁과 1232년(고종 19)의 강화천도는 개경 사찰의 황폐화로 이어졌다. 전쟁과 화재로 퇴락한 사찰이 많았으며, 주요 시설이 강도(江都)로 이전되면서 봉은사, 흥국사(興國寺), 왕륜사 등 개경에 있던 대찰들도 강도로 이전하여 개경의 옛 사찰은 관리가 되지 못한 상태에 놓였던 듯 하다. 몽골과 강화를 맺은 뒤 1270년(원종 11) 5월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조정은 개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데, 1273년(원종 14) 사원조성별감(寺院造成別監)을 두어 절의 수리와 관리를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충렬왕대가 되면 보제사(普濟寺), 안화사 등 개경 대찰의 상당수가 복구되었으며, 이후에도 사찰 중수는 지속되었다. 원간섭기 개경에는 강화 천도 이전의 주요 사찰이 중수·중창되는 한편 고려와 원(元)나라의 특수한 관계의 영향으로 묘련사(妙蓮寺)나 민천사(旻天寺) 등 원 황제나 제국대장공주의 원찰이 창건되었다. 고려시대 개경의 사찰은 종교시설인 동시에 왕도의 위엄을 구현하는 시설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공적 시설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고려 불교교단의 중심이었고, 연등회, 팔관회를 비롯하여 담선법회, 문수회, 기신도량 등 주요 불교행사가 치러지는 국가·왕실의례의 공간이었다. 또한 왕실의 진전사원이자 원찰로서 기능하며 정치세력의 변화와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국청사 창건, 이자겸의 난, 무신집권기 이의방(李義方)과 최충헌(崔忠獻)에 반대하는 개경 사원세력의 무력시위 등은 개경 사찰과 정치세력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벌어진 정치적 사건이었다. 개경의 사원은 실제로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국왕의 사원 행차는 매우 자주 있었던 일로 무엇보다도 국가차원의 불교행사를 위해 행차하는 일이 많았다. 절에서 교서를 반포하거나 군인을 선발하기도 했고, 물가와 도량형 조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며 만적의 난 당시 만적은 흥국사와 보제사를 거사장소로 정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폐위된 왕의 임시거처로 활용되기도 했고, 왕실 구성원의 요양장소가 되기도 하였으며 공민왕대 일어난 흥왕사의 난에서 보듯 사찰이 국왕의 행궁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함께 사교(四郊)를 비롯하여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사찰은 군대가 주둔하는 등 방어의 요새가 되기도 했고, 천수사의 경우처럼 남쪽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전송하고 맞이하는 장소이자 여행객들이 머무는 원(院)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또한 개경의 사찰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공개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개국사나 보제사에 설치되었던 진제장(賑濟場)처럼 사람들을 구휼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고, 교역장소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한편, 자하동 인근의 안화사처럼 경치가 좋은 곳에 위치한 사찰은 국왕이 행차하여 연회를 열기도 했고, 최충(崔沖)의 구재학당(九齋學堂) 생도들이 구산사에서 하과(夏課)를 보냈고, 충렬왕이 행차하여 이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개경의 절은 왕도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시설이었다. 도성 내외의 평지와 산지에는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가 즐비하였다. 개경의 절은 고려 불교 사상과 신앙을 이끈 종교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사회적으로 공적인 기능을 하는 시설로 고려의 정치, 문화, 사상, 경제가 집약된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개성의 사찰】 조선 건국과 한양정도(漢陽定都)는 개성 사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국초부터 성리학중심의 국가질서를 수립하면서 공적 영역에서 불교의 기능을 배제해 나감으로써 불교는 점차 위축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사원의 도태를 가져왔다. 개성의 사찰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점차 쇠퇴해 갔는데, 가장 먼저 일어난 변화는 봉은사 태조진전이 폐쇄된 것이었다. 하지만 개성의 사찰 중 연복사(演福寺), 광명사 등 고려말 중시되었던 사찰들과 조선 건국 전부터 이성계의 원찰이었던 관음굴(觀音窟), 정종의 원당이 된 화장사(華藏寺) 등은 국초에는 사세가 유지되며 소재도량(消災道場)이나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와 같은 국행 및 내행 불사들이 거행되었다.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것은 건국 직후 연복사탑 중창이 완공된 일이었다. 아울러 1차 왕자의 난 이후 개성으로 천도하면서 개성 중심의 사찰 운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1405년(태종 5) 다시 한양으로 환도한 이후 왕실의 원당도 한양과 한양 인근에 새롭게 설정되면서 개성 사찰은 왕경의 사찰이 아닌 지방 사찰로 위상이 급락하였다. 1407년(태종 7) 자복사(資福寺)를 새로 정할 때 개성 사찰은 포함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기존 대찰 중 상당수가 유지되고 있어서 1424년(세종 6) 불교교단을 선교양종으로 나누고 모두 36개 사찰씩만 공인하는 조처가 이루어졌을 때 숭효사(崇孝寺), 연복사, 관음굴, 광명사, 신암사(神巖寺), 감로사(甘露寺), 연경사(衍慶寺), 영통사(靈通寺) 등 8개 사찰이 각기 일정한 원속전과 항거승을 두도록 공인 받았다. 이처럼 조선초 개성의 일부 사찰에 대한 국가와 왕실의 후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15세기 상당수의 사찰이 퇴락하거나 폐사되어 갔다. 소위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때문이기도 했지만, 불교를 억압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한양과 인근의 일부 사찰은 새로 창건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사세를 유지했기 때문에 개성 사찰의 퇴락은 조선개창과 함께 변화된 개성의 위상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건물이 낡기도 하고, 화재나 천재지변으로 인해 건물이 퇴락하게 되었을 때 재정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서 결국 폐사지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15세기 개성에는 폐사지로 남아 있거나 혹은 상당히 퇴락한 상태로 유지되던 사찰이 많았는데, 이러한 상황은 15세기 찬술된 개성유람기에서 확인된다. 16세기에는 폐사되거나 황폐화 되는 사찰이 더 증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15세기 개성유람기에 존속되던 절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터로 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7개의 절과 19곳의 절터만이 확인될 뿐이다. 귀법사, 개국사, 연복사, 대흥사(大興寺), 광암사(光巖寺) 등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폐사된 사찰들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개성의 사찰이 더욱더 쇠락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으니 흥국사 등이 임진왜란 중에 폐사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개성에서도 사찰이 있던 곳에 새롭게 관아나 서원 등이 들어서기도 했고, 절은 없어지고 원(院)만 남아 운영되기도 하였다. 개국사터에는 사포서(司圃曙)가, 흥국사터에는 훈련청(訓練廳)이 만들어졌다. 천수사는 성종대에 이미 빈터만 남아 모두 밭두둑이 된 채 여행객들이 숙박하는 원(院)으로만 사용되었다. -
개성부_고려
【목차】 ° 고려 개성부의 변천 ° 고려 개성부의 기능과 위상 【고려 개성부의 변천】 995년(성종 14) 처음 설치되었다. 성종 14년 지방제도를 10도로 개편하면서 수도 개경을 지원하는 행정구역으로 6개의 적현(赤縣)과 7개의 기현(畿縣)을 설치하였는데, 개성부는 이곳의 행정을 맡은 관청이다. 성종 때 설치된 개성부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하나는 적현과 기현의 행정만 맡았다고 보는 연구 성과로, 개성부의 위치가 수도인 개경 서쪽에 있는 개성현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는 당시 개성부가 수도 개경의 행정도 맡았다고 보는 연구 성과로, 개성부가 개경 안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관청의 명칭이 개성부였다는 점으로 볼 때, 고려전기 개성부는 적현과 기현의 행정만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1018년(현종 9) 고려의 지방제도가 ‘주현속현제도’로 개편되면서 개성부도 혁파되었다. 이에 따라 적현 6개와 기현 7개는 각각 개성현과 장단현을 주현(主縣)으로 하는 ‘주현속현제도’로 개편되었다. 1062년(문종 16)에는 개성현을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로 승격시키는 대신 장단현령(長湍縣令)을 혁파하여 장단현과 장단현의 속현들을 모두 지개성부사의 속현으로 이속시키고, 여기에 평주(平州)의 속현이었던 우봉군(牛峯郡)까지 이속시켰다. 따라서 문종 때 개성현이 승격된 지개성부사를 주현으로 하는 ‘개성부영역’에는 주현인 지개성부사를 비롯하여 우봉군(牛峯郡), 정주(貞州), 덕수현(德水縣), 강음현(江陰縣), 장단현(長湍縣), 임강현(臨江縣), 토산현(兎山縣), 임진현(臨津縣), 송림현(松林縣), 마전현(麻田縣), 적성현(赤城縣), 파평현(坡平縣)) 등 12개의 군현이 속현으로 속하게 되었다. 즉 문종 16년의 개성부(지개성부사)는 개경 외곽지역인 ‘경기13현’의 행정을 맡은 지방 관부였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면서 개편되었다. 곧 국가 전체의 정치제도를 개편하면서 개성부에 급전도감(給田都監)과 5부(五部)를 병합하여 도성 안의 행정을 맡게 하였고, 따로 개성현에 현령을 두어 도성 밖의 행정을 맡게 하였다. 즉 개경과 그 외곽지역인 ‘경기“의 통치제도는 개성부 밑에 개경 5부(사)와 개성현(령)이 병존하는 구조가 되었다. 이에 따라 개성부의 중심에 개경 5부가 들어오게 되었고, 개성부는 본격적으로 수도 개경의 행정을 맡게 되었다. 공민왕 때 개성부의 관원이 부분적으로 개편되었지만 충선왕 복위년에 개편된 개성부는 거의 그대로 고려말·조선초까지 이어졌다. 1390년(공양왕 2) 경기가 좌도와 우도로 나뉘고, 각각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설치되면서 개성부와 경기영역은 제도적으로 분리되었지만, 개성윤(開城尹) 1명이 경기관찰사를 겸하는 형태로 개성부는 경기영역의 행정에 계속 관여하였고 그 결과 조선 건국 후에도 개성부는 수도 개경과 그 주변지역인 경기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려 개성부의 기능과 위상】 995년(성종 14) 설치된 개성부의 관원으로는 개성부윤만이 확인되는데, 이 때 설치된 개성부의 관원은 현종 9년 개성부가 혁파될 때 함께 혁파되었다. 문종 16년 개성현지역과 장단현지역이 통합하여 설치된 개성부에는 장관인 지개성부사를 비롯하여 개성부 부사(副使), 개성부 판관(判官), 개성부 법조(法曹) 등의 관원이 있었는데, 모두 지방관이었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여 개편한 개성부에는 판부윤(判府尹) 1명(종 2품), 윤(尹) 2명(1명은 겸관, 정 3품), 소윤(少尹) 3명(1명은 겸관, 정 4품), 판관(判官) 2명(정 5품), 기실참군(記室參軍) 2명(정 7품)의 관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품질에 따라 선공사(繕工司)의 직사를 겸하였다. 또한 이때에는 도성 밖의 행정을 맡은 개성현령도 두었다. 충선왕 복위년에 설치된 개성부의 관원은 공민왕 때 두 차례 부분적으로 개편된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고려말·조선초로 이어졌다. 조선 건국 직후 설치된 개성부에는 판사 2명(정2품), 윤 2명(종2품), 소윤 2명(정4품), 판관 2명(정5품), 참군 2명(정7품), 령사(令史) 6명(8품)을 두었다. 고려전기 개성부가 적현과 기현, 경기 13현 등 수도 개경 주위의 군현의 행정을 맡은 지방관부였다면, 고려후기 개성부는 본격적으로 수도 개경의 행정을 맡은 관부였다. 고려후기 개성부가 맡은 일이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은 공양왕 때이다. 1389년(공양왕 원년)에는 개성부로 하여금 가사(家舍), 재물(財物), 배상을 추징하는 일을 맡도록 하였고, 이듬해에는 개성부가 효자와 순손을 등용하며, 의부와 절부를 표창하고, 크고 작은 학교를 점검하여 인재를 양성하며, 악역과 간사한 일을 금하여 풍속을 교정하고, 농상(農桑)·호혼(戶婚)·전토(田土)·포흠(逋欠)·숙채(宿債)·목민(牧民)의 일을 맡게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목민관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따라서 개성부에서는 이전에도 이러한 일들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
개성부_조선
【목차】 ˚ 조선시대 개성부의 변천 ˚ 조선시대 개성부의 관원과 기능 【조선시대 개성부의 변천】 건국 후 개성은 잠시 조선의 수도였으므로 개성부는 수도의 행정을 관할하였다. 곧 조선 태조는 1392년(태조 1) 7월에 개성부를 두어 개성뿐만 아니라 경기(京畿)의 토지·호구·농상·학교·사송(詞訟)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에는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고, 이듬해 6월에는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성부(開城府)를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로 고쳤다. 따라서 개성부는 수도 관할기구의 지위를 잃고 옛 수도의 행정을 맡는 관서가 되었다. 1398년 윤 5월에는 개성현(開城縣)을 폐지하여 개성 유후사에 예속시켰다. 1399년(정종 1) 2월 다시 수도를 개성으로 옮기면서 개성유후사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개성은 수도의 기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채 유후사 체제를 유지하였으며, 1405년(태종 5) 10월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개성유후사는 수도 개성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1438년(세종 20)에는 개성 유후사를 다시 개성부로 개편하고 유후도 유수로 개칭되어 개성은 한양을 보좌하는 유수부가 되었으며 한성부와는 위상이 완전히 구분되었다. 이런 체제는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그 뒤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1895년(고종 32) 대한제국이 23부를 설치하기 전까지 이때 마련된 직제가 대체로 지속되었다. 1896년 개성유수부는 관찰부로 개편되면서 부윤을 두었다가 다음 해 관찰부가 폐지되면서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30년 12월 제령(制令) 제15호에 의해 지방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부제(府制)가 실시되면서 다시 개성부로 개칭되었다. 이때 부외(府外)는 개풍군이 되었다. 【조선시대 개성부의 관원과 기능】 건국 후 개성은 잠시 수도로서 경기지역의 행정까지 아울러 담당하여, 개성윤 1명이 경기관찰사를 겸해 경기지역의 행정을 함께 관여하였다. 1392년(태조 1) 개성부의 관원은 판사(判事) 2명 정2품이고, 윤(尹) 2명 종2품이고, 소윤(少尹) 2명 정4품이고, 판관(判官) 2명 정5품이고, 참군(參軍) 2명 정7품이고, 영사(令史) 6명은 8품이었다. 이들은 근무 기간이 끝나고 직을 떠나더라도 봉급을 받을 수 있었고, 그밖의 관원은 권지(權知)로 하였다. 1395년(태조 4) 6월 개성유후사에 유후, 부유후와 행정실무자들인 단사관(斷事官)·경력(經歷)·도사(都事) 각 1인씩을 두어 통치하였다. 개성유후는 정2품직으로 한성부와 마찬가지로 경관(京官)을 임명하였다. 그 후 의학 교유(醫學敎諭)와 검률(檢律) 각 1인씩을 갖추어 두었다. 1438년(세종 20)에는 개성부에 종2품 유수 2인을 두어 1인은 경기관찰사가 겸임하게 하였다. 따라서 개성부의 위상은 정 2품 아문인 한성부보다 한 단계 아래가 되었으며 개성부는 경기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 개성부를 외관(外官)에 소속시키고 유수ㆍ단사관ㆍ경력ㆍ도사를 폐지하였으며 부윤(府尹)·판관(判官) 각각 하나씩을 두었다. 1469년(예종 1)에는 다시 유수(종 2품)·경력(종 4품)·도사(종 5품) 각 1인을 두었다.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개성부의 직제는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경력 1인, 도사 1인, 교수 1인, 서리(書吏) 40인, 조례(早隷) 30여 인으로 법제화하였다. 1865년(고종 2)에는 개성부 관원에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경력 1인, 분교관(分敎官) 1인, 검률 1인, 서리 50인, 조례 30여 인 등이 소속되었다. 또 개성유수는 관리영사(管理營使)를 겸하고 강화유수는 진무영사(鎭撫營使)를 맡아 수도의 외곽 방어에 책임을 졌다. -
개성상인
【목차】 ˚ 개설 ˚ 개성상인의 기원 ˚ 조선전기 개성상인 ˚ 조선후기 개성상인 ˚ 근현대 개성상인 【개설】 조선~근대 시기 다양한 상업 활동을 전개한 개성 출신의 상인 집단이다. 이들은 15세기 중반 이후 상업을 생계수단으로 선택하였다. 그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발전하였고, 조선후기에는 서울상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다른 상인집단이 주변화되거나 쇠퇴된 것과는 달리 경제력을 유지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고향 개성을 상실한 위기 속에서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처럼 개성상인은 550년 넘게 활동해 온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상인이다. 【개성상인의 기원】 개성상인의 기원은 15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개성상인의 형성에는 조선건국과 한양 천도가 큰 영향을 끼쳤다. 한양 천도 당시 개경(開京)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조선 왕조를 따라 한양으로 떠났다. 고려를 버리고 조선을 따를 수 없었던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낙향을 선택하여 개성을 떠났고 나머지는 개성에 그대로 남았다. 개성에 남은 이들의 2~3대 후손들이 장사를 시작하면서 개성상인을 형성하였다. 개성 유민(遺民)은 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부는 1470년대까지 개성에서 과거를 시행하지 않아서 개성 유민에게는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개성 유민을 회유하기 위해 특별 과거를 두 차례 실시하지만 응시자가 한 명도 없자 이에 분노하여 개성에서 과거를 금지시켰다는 말이 전해온다. 이후 과거 금지가 풀리고 개성 출신 과거 합격자들이 배출되지만, 그들은 지방관 이상의 관직을 가질 수 없었다. 개성 유민은 농업을 생업으로 선택하기도 어려웠다. 개성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인데 분지 내부 면적이 넓지 않아서 농사지을 수 있는 토지가 적다. 이는 개성 유민이 농업으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도 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관직이나 농사에 종사하기 힘들게 된 개성 유민은 생계 수단으로 수공업과 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여서 개성 유민이 장사를 시작하는 데는 2~3세대의 기간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15세기 중반 이후 개성 유민의 후손들은 장사를 시작하였다. 개성상인의 형성 시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도 보인다. 【조선전기 개성상인】 장사를 시작한 개성사람들은 타지로 나아가서 장사하는 방법을 택하였는데, 이를 지방출상(地方出商)이라고 불렀다. 이는 개성 출신 상인이 많은 데 반해 수도의 지위를 상실한 개성의 상권(商圈)은 그들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방으로 장사를 떠나는 이들은 대개 가난하였다. 그들은 장사 밑천을 개성의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초창기부터 개성상인 상호 간에 자금 융통이 활발하였음을 의미한다. 다만 조선전기에는 장사를 시작한 초기였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이었고 동시에 개성상인 상호 간의 신뢰 또한 굳건하지 못했다. 채권-채무 관계를 맺은 개성상인 간에 갈등이 빈발했던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채무 청산에 문제가 발생한 경우 관에 처리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해 조선전기 개성부는 송사(訟事)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였다. 【조선후기 개성상인】 조선후기 개성상인은 전기의 시행착오를 극복하면서 상업 전통을 발전시키고, 또 국내 교역은 물론 국제 무역까지 주도하면서 조선을 대표하는 상인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전기 채무를 둘러싼 갈등은 후기 들어 극복되어 갔다. 이런 사실은 조선후기 개성부를 언급하면서 송사가 거의 없어서 일이 많지 않은 곳이라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곧 물주(物主)라고도 불리는 개성의 부유한 상인들은 신용과 성공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르기 위해 개성의 남자 아이를 가게에서 일을 시키며 관찰하였다. 어린 소년 입장에서는 가게 일을 도우면서 자연스럽게 상인으로서의 기본 자질과 소양을 배울 수 있었다. 물주는 수년 간 소년을 지켜보면서 사람 됨됨이와 상인으로서의 성공 가능성을 지켜보았고, 어느 정도 확신이 서면 그 사람에게 장사 밑천을 융통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가게에서 일하면서 장사의 기본을 배우는 어린 남자아이를 사환(使喚)이라 불렀다. 이 과정을 거친 소년이 20대 전후의 나이가 되면, 그는 주인으로부터 밑천을 조달할 수 있고 그것을 갖고 장사가 유망한 곳이면 전국 어디든 진출하여 그곳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이때 주인과 젊은 개성상인은 주인과 차인(差人, 남이 장사하는 일을 시중드는 사람) 관계를 맺게 되고 이를 줄여서 주차동사(主差同事)라고 부른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채무를 둘러싼 문제는 크게 줄어들었다. 처음부터 지방출상을 상업 방식으로 선택한 개성상인은 조선후기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진출하여 전국을 무대로 활발한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북쪽으로는 함경도의 인삼을 선매(先買)하였고, 남으로는 제주도의 양태, 망건 등을 교역하였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에서 부자가 많기로 서울이 으뜸이며, 그 다음으로 개성을 꼽고 있다. 그러면서 그 거부(巨富)들은 국내 교역뿐 아니라 2년 혹은 3년 주기의 국제무역을 좌우하면서 재물을 모은다고 하였다. 개성상인이 서울상인과 어깨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국제무역이 큰 역할을 하였다. 대체로 17세기부터 18세기 전반기는 조선, 청나라, 일본 간에 활발한 상품 교역이 이루어지는 삼국 간 무역 호황기였다. 각 국은 상대 국가로부터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고가의 상품을 갖고 있었다. 조선의 인삼, 중국의 비단과 백사(白絲), 일본의 은이 그것이었다. 삼국 무역을 주도한 핵심 세력은 개성상인이었다. 그들은 백두산 부근에서 채취된 인삼을 매점한 후 왜관으로 갖고 가서 일본인에게 판매하였다. 그 대가로 얻은 은화를 갖고 중국 상인과 교역하였다. 이처럼 인삼과 은을 매개로 대일, 대청 무역을 주도하면서 개성상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근현대 개성상인】 1970년대 개성상인 연구는 개항 이후 일본 상인 자본의 침략과 해체 작용 때문에 개성상인도 크게 타격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해 일본의 자본과 상인의 침투로 서울상인을 포함하여 다수의 전통 상인들이 주변으로 내몰리거나 쇠퇴한 데 반해 개성상인은 일제강점기는 물론 6.25전쟁 이전까지 활발히 상업활동을 전개한 사실이 밝혀졌다. 개성상인이 다른 전통 상인과 달리 개항 이후에도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들 고유의 상업 관습 때문이다. 지방출상과 사환, 주차동사 등의 관습은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활용되었다. 많은 개성의 어린 남자 아이들은 이 시스템을 통해 훌륭한 상인으로 성장하고,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재생산 시스템이 작동하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도 개성상인이 계속 배출된 것이다. 그들은 전국의 상업 유망 지역으로 진출하여 장사를 하였다. 일제강점기 지방출상 인원은 시기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대략 3천 명 내외로 추산한다. 개성상인은 특유의 신용제도도 갖고 있었다. 대개 18세기 혹은 19세기 전후로 형성된 시변(時邊)이 그것이다. 시변의 가장 큰 특징은 무담보 신용대출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개성상인 가운데서도 신용이 가장 확실한 사람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그 수는 대략 150~200여 명 정도였다. 시변 참여는 부자들이 많은 개성 안에서도 경제력을 인정받는 잣대가 되었다. 시변의 또 다른 특징은 이율 변화에 있다. 시변 이율은 월별로 차이가 있었다. 월별로 자금의 수요와 공급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또 같은 달 안에서도 5일 단위로 이율이 하락하도록 되어 있어서 그 달 마지막 4~5일을 남기고는 이율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시변 이율은 근대적인 금융기관의 이율 변화에 조응하여 변동하였다. 시중 은행의 금리보다는 2% 정도 높았지만 무담보 신용대출이라는 장점 때문에 개성상인은 시변을 이용하였다. 시변을 통해 융통되는 자금은 개성상인이 상업활동, 지주경영, 삼포 경영 등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그 규모가 몇 백만 원에 이른다. 이러한 내부 신용제도는 일제가 근대적인 금융기관의 자금력을 앞세워 한국인 자본을 무력화시켜 나갈 때 개성상인들이 그에 휩쓸리지 않고 세력을 유지해 가는 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경제력을 잃지 않았던 개성상인은 6.25전쟁 이후 개성의 북한 편입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해방 후 개성은 38선 이남에 있었지만, 정전 협정 과정에서 북한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거지 상실로 개성상인이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월남 개성상인 중에는 오랜 상업 전통에 입각하여 성공적으로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OCI, 삼광글라스, 유니드, 대한유화공업(주), 아모레퍼시픽, 녹십자, 한일시멘트, 신도리코, 성보실업, 성보화학, 서일(주), 서흥캅셀, 삼정펄프, 동양고속(주) 등이 있다. 이들 회사의 창업주들은 개성상인의 오랜 상업전통에 입각하여 기업을 경영하고 있다. 이처럼 전쟁으로 본거지를 상실하였지만, 개성상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창업 1세대 혹은 2세대까지는 개성상인의 전통이 이어질 수 있겠지만 3세대 이후까지 그런 전통이 이어질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
개성유학
【목차】 º 서경덕과 그의 문인 º 조선후기 개성유학의 흐름 º 성격과 의의 【서경덕과 그의 문인】 조선시대 개성에서 전개된 지역 유학이다. 개성은 고려 유학의 중심지였고 공민왕 이후 성균관을 중심으로 신유학이 발흥하였지만, 조선 왕조에 들어와 성종대까지 유학 전통이 거의 단절되었다. 따라서 개성 유학은 서경덕(徐敬德)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서경덕은 스스로 성리학을 연마하여 전국적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역(易)』과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중심으로 역학(易學)과 수학(數學)에 정통하여 ‘동국(東國)의 소옹(邵雍, 『역경』을 연구하면서 수가 모든 존재의 기본이라는 상수학 이론을 만든 송나라의 사상가)으로 평가받았다. 그는 대표작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을 통해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을 개진하였다. 일기장존설이란,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구체적인 사물은 소멸되어도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서경덕의 수제자로는 허엽(許曄), 박순(朴淳), 민순(閔純) 등이 꼽힌다. 선조대 이후 서경덕을 연원으로 하는 화담학파 구성원들은 대개 북인 정파를 구성하였다. 서경덕의 역학은 신흠(申欽)의 역학에 영향을 주었고, 북인계 남인학자 유형원(柳馨遠)과 윤휴(尹鑴)에게도 학문적 영향이 미쳤다. 지역 사회에서 서경덕의 학풍을 계승한 인물로는 마희경(馬羲經)과 이경창(李慶昌)이 저명한데, 개성 사회에서 마희경, 한순계, 김현도(金玄度), 이경창 등 4인은 서경덕을 계승하는 사현(四賢)으로 기념되어 서경덕을 배향하는 화곡서원(花谷書院) 곁에 사현별묘(四賢別廟)가 건립되었다. 【조선후기 개성유학의 흐름】 개성 유학은 18세기 이후 낙학(洛學)과 연결되어 유학 전통을 부흥시켰다. 개성 사인은 개성에서 향사(鄕師)를 정하고 중앙에서 경사(京師)를 정하여 유학을 연마하였다. 이들은 이재(李縡)의 문하인 김시석(金時鐸), 허증(許增), 박정한(朴貞幹), 우창락(禹昌洛)과 이재의 문인인 이의철(李宜哲) 문하인 임유(林游), 임순(林洵),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인 조유선(趙有善), 조유헌(趙有憲), 조형온(趙絅溫), 우창락(禹昌洛), 김이안(金履安)의 문하인 마유(馬游), 장붕일(張鵬逸), 그리고 오희상(吳熙常)과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인 조정휴(趙鼎休), 김성대(金聲大), 김환형(金煥亨), 김관형(金觀亨), 장석오(張錫五), 문상옥(文尙鈺)으로 나아갔는데, 이들 문하는 18~19세기 낙학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었다. 18세기 개성 유학의 번영은 개성 유학의 경학적 전환을 초래하였다. 종래 개성 유학은 서경덕을 시작으로 16~17세기 마희경, 이경창, 윤충갑(尹忠甲), 석지형(石之珩) 등을 통해 단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석지형이 완성한 『오위귀감(五位龜鑑)』은 17세기 개성 역학의 실제 수준과 경세적 성격의 이해에 긴요한 작품이다. 개성의 수학 전통 역시 이경창, 김문표(金文豹) 등에 의해 확인되는데, 김문표의 「사도설(柶圖說)」은 안정복(安鼎福)의 『동유성리설(東儒性理說)』에 편입될 정도로 학술적 가치를 평가받았다. 18세기 이후 개성의 경학은 사서오경 전반에 걸친 주자학적 연구를 특징으로 하였다. 허증(許增)의 「중용석의(中庸釋義)」, 허무(許懋)의 「대학중용도(大學中庸圖)」, 한이원(韓履源)의 「기유봉사십조도(己酉封事十條圖)」 등이 출현하였고, 조유선(趙有善)은 「사서오경(四書五經)」, 「근사록(近思錄)」, 「주자어류(朱子語類)」,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경의(經義)를 연구하였다. 허무(許懋)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집필을 시도하고, 박정한(朴貞幹)이 단행본 저술 형태로 『경의집해(經義集解)』를 완성한 것은 개성 경학의 주목할만한 사건이었다. 예학의 발달도 병행되었다. 숙종대 윤증(尹拯) 문하에서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영예를 들은 김두문(金斗文)은 개성 예학의 개척자로 생각되며, 김두문 이후 박인형(朴仁亨), 한광진(韓光鎭), 정유섭(鄭柔燮) 등이 예설에 밝았다. 정조의 『향례합편(鄕禮合編)』을 배경으로 조유선은 개성의 향사례홀기(鄕射禮笏記)를 통일하는 작업을 펼쳤고, 김헌기가 이를 계승하여 1820년(순조 20) 『향사례홀기(鄕射禮笏記)』를 완성하였다. 조유선의 문인 우덕린(禹德麟)은 예학에 정통하여 상제례(喪祭禮)에 관한 여러 예설을 모아 『이례연집(二禮演輯)』을 완성하였다. 개성 사회에서 경학의 발달은 이학의 부흥을 견인하였다. 이경창의 「원리기설(原理氣說)」 이후 오랜 기간 중단된 이기론 연구는 19세기 개성의 대유 김헌기(金憲基)가 등장하여 재개되었다. 그가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지어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과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의 원리를 설명한 것은 개성 유학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성격과 의의】 개성 유학은 조선후기 낙학의 유입과 연계되어 도시 지역에서 발달한 지역 유학이었다. 조선후기 상업 도시로 발달하는 지역에서 지역 유교 전통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서경덕과 김헌기는 개성 유학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두 극점이었다. 김택영(金澤榮)은 『중편한대숭양기구전(重編韓代崧陽耆舊傳)』에서 개성 유학의 시종을 서경덕과 김헌기로 설정하였고, 김택영의 문인 왕성순(王性淳)은 『조선오현문초(朝鮮五賢文鈔)』에서 조선성리학의 오현을 ‘서경덕-이황(李滉)-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김헌기’로 구성하였다. 고종대 김택영은 김헌기의 『초암집(初菴集)』을 간행해 후학의식을 표하였고, 왕성순 등 문인들의 도움으로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과 『숭양기구시집(崧陽耆舊詩集)』을 편간하여 개성의 문화 전통을 현창하였다. -
개성읍지
조선 후기에 편찬된 개성지방의 지방지(地方志)이다. 현재 남아 있는 개성읍지로는 1648년(인조 26)에 김육(金堉)이 편찬한 『송도지(松都誌)』, 1782년(정조 6)에 정창순(鄭昌順)이 편찬한 『송도지(松都誌)』, 1802년(순조 2)에 김문순(金文淳)이 편찬한 『송도속지(松都續誌)』, 1824년(순조 24) 김이재(金履載)가 합본한 원지(原誌)와 속지(續誌)를 토대로 1830년(순조 30)에 서희순(徐喜淳)이 간행한 『중경지(中京誌)』, 1830년 이후 임효헌(林孝憲)이 이전에 편찬된 개성읍지들을 종합하여 편찬한 『송경광고(松京廣攷)』가 있다. 이 외에도 한재렴(韓在濂)이 개성의 역사, 자연, 사적에 대하여 정리한 『고려고도징(高麗古都徵)』이 있다. 이 책들은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김육이 편찬한 『송도지』는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개성읍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정창순이 편찬한 『송도지』 맨 앞에는 목판 지도인 「송도폭원도(松都幅員圖)」와 「송도성내도(松都城內圖)」가 실려 있는데, 이 지도들은 이후 개성읍지에 실린 목판지도의 저본이 되었다. 김문순이 편찬한 『송도속지』는 1796년(정조 20) 금천군의 대남면과 소남면, 장단부의 사천면이 개성부에 이속되어 개성부의 영역이 확대된 후에 편찬한 것이며, 이 책에 실린 「송도폭원도」는 1796년 확대된 개성부의 영역이 반영되어 있다. 『중경지』 맨 앞에는 목판지도인 「중경폭원도(中京幅員圖)」와 「중경성내도(中京城內圖)」가 실려 있는데, 「중경폭원도」는 1823년 개성부에 병합된 풍덕군의 영역을 포함하여 새로 만든 것이고, 「중경성내도」는 이전의 「송도성내도」와 거의 같다. -
개성의 교통
【목차】 ˚고려시대 개경의 교통로 ˚조선시대 개경의 교통로 【고려시대 개경의 교통로】 고려시대 개경 내부의 중심지는 십자가(十字街)와 남대가(南大街)였다. 개경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廣化門) 밖에서 동쪽으로 형성된 관도(官途, 관청거리)를 지나면, 남쪽으로 남대가가 뻗어 있었다. 남대가는 개경 나성의 서문인 선의문(오정문)과 동문인 숭인문을 잇는 나성 내부 동서 방향의 중심도로와 교차하였는데, 이 교차점이 십자가였다. 당시 개경 제1의 번화가는 광화문에서 남대가를 거쳐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광화문에서 동쪽으로 난 관청거리에는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남대가에는 시전의 긴 행랑이 좌우로 늘어서 십자가까지 이어졌다. 십자가는 남대가와 아울러 관청과 시장, 불교 사원 등 개경의 주요 시설들이 위치했던 거리이다. 십자가는 북쪽으로 남대가를 거쳐 궁궐로 향하는 지점이었던 동시에, 궁궐에서 전국 각지의 주요 지역을 왕래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십자가는 남대가와 아울러 개경 시내 모든 도로의 중심축이었으며, 나라 전체 도로망의 본격적인 시작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하였다. 십자가의 서쪽으로는 서경과 벽란도로 향하는 길이 연결되었고, 남쪽으로는 강화도와 조강(祖江,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가는 구간) 방면,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함경도 및 강원도 지역인 동계와 교주도 방면,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충청·전라·경상도 방면의 도로가 이어졌다. 각 방면으로 향하는 도로 근방에는 주요 지점마다 역(驛)이나 원(院) 시설이 설치되어 있어서, 왕래하는 이용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특히 개경 나성 외곽의 4교(四郊)에는 금교역(金郊驛), 도원역(桃源驛), 청교역(靑郊驛), 평리역(平理驛) 등이 위치하여 공적(公的)인 사신을 접대하고 그들의 사행(使行)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각 지방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중에서도 청교역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전달되는 공문서들이 반드시 경유하는 곳으로, 지금의 중앙우체국과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기관이었다. 십자가에서 서쪽으로 향하면 나성의 선의문으로 이어지는데, 선의문 밖 일대를 가리켜 서교(西郊)라고 불렀다. 선의문과 서교는 개경의 서쪽 관문이었다. 서교에서는 두 갈래의 길이 갈라졌다. 하나는 서북쪽으로 향하여 서경(평양)과 의주 방면으로 이어졌으며,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예성강 하구를 지나 해주 방면으로 연결되었다. 십자가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정몽주가 최후를 맞이했던 선죽교가 있었고, 나성의 동쪽 관문이었던 숭인문도 있었다. 숭인문 밖 일대는 동교(東郊)에 포함되었으며, 그 동쪽으로는 다시 두 갈래의 갈림길이 나왔다. 동북쪽으로는 철원과 교주 등을 거쳐 동계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장단나루와 적성 등을 지나 양주(현 서울시에 해당하는 양주와 한강의 광나루)에 도달하는 장단나룻길이 이어져 있었다. 반면 십자가로부터 동남쪽으로는 개경 나성의 장패문과 청교역이 위치하였는데, 이 일대 역시 동교에 포함되었다. 이 교통로는 임진나루 및 파주, 한강나루 등을 거쳐, 남방으로 향하는 임진나룻길로 연결되었다. 고려 전기에는 개경에서 남방으로 이동하는 경우에 주로 장단나룻길을 이용하였다. 장단나룻길은 삼국시대부터 중시되었던 교통로였다. 11세기 중반부터는 임진나룻길의 비중이 점차 증가하였고, 12세기가 되면 임진나룻길의 중요도가 더욱 높아졌다. 숙종 연간(1095~1105) 현재 서울 사대문 안에 남경(南京)의 중심지를 설치한 것이 임진나룻길의 비중을 높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임진나룻길은 이미 11세기부터 이용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임진나루에 배다리(船橋)를 만들어 여행객들의 왕래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여행객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임진나루에 세워진 사찰이었던 과교원(課橋院)은 배다리의 설치와 함께 자제사(慈濟寺)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임진나루 근처의 보통원(普通院)에서는 빈민 구제소를 설치하여 굶주리는 방랑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다. 한편 십자가에서 남쪽 방면으로는, 나성의 회빈문(會賓門)을 통하여 강화와 조강(祖江) 방면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나성의 동북쪽 출구인 영창문(탄현문)을 통해서는, 천마산(天摩山)과 성거산(聖居山) 등의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조선시대 개성의 교통로】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한양(漢陽)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개성은 그 국가적 중요성이 크게 약화되었고 교통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한양에 넘겨주었다. 하지만 옛 개경의 중심부인 나성 내부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그대로 개성의 중심부로 유지되었으므로, 십자가와 남대가를 중심으로 하는 개성 시내의 도로구조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개성에서 지방의 각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의 경우, 그 중요도와 비중에 변화가 있었다. 먼저 개성의 위치가 한양과 멀지 않은 만큼, 한양에서 개성을 거치는 교통로의 중요성은 여전히 높았다. 남쪽의 한양에서 개성을 거쳐 북쪽의 평양·의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의주로(義州路)라 불리면서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교통로였다. 고려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한양과 중국 사이를 오가는 사신들은 개성을 경유하여 이동했던 관계로, 의주로 상에서 개성의 비중은 매우 높았다. 고려시대 개경의 남쪽 관문 역할을 하던 청교역은 조선시대에도 개성의 관문으로서 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며, 한양 방면으로는 장단에 동파역(東坡驛), 파주에 마산역(馬山驛) 등이 위치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개경과 한양 사이의 교통로 상에 위치한 역들을 청교도(靑郊道)로 편성하여 청교역을 대표역으로 삼았으나, 조선시대에는 영서도(迎曙道)로 편성하여 한양의 서북 관문인 영서역을 대표역으로 설정하였다. 즉 청교역의 비중이 조선시대에 들어서 약화된 것이다. 한편 조선 초기에는 청교역과 동파역 사이 옛 보현원(普賢院)이 있던 곳에 초현역(招賢驛)을 설치한 적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폐지하였다. 개성에서 평양 방면으로는 금교역과 흥의역(興義驛)을 거쳐 평산으로 이어졌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강음현과 우봉현의 통합으로 금천군(金川郡)이 생겨나면서, 금교역은 평산 보산역(寶山驛)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 개성에서 동북방 함경도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는 그 중요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이에 노선의 차이가 없었던 한양 및 평양·의주 방면 교통로와는 달리, 함경도 방면의 경우 개성에서 왕래하는 교통로와 한양에서 왕래하는 교통로 사이에 노선의 차이가 있었던 까닭에 발생한 일이었다. 개성에서 동북 방면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즉 장단의 도원역과 백령역(白嶺驛), 그리고 마전과 연천 등을 거쳐 함경도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는 고려시대에 비하여 그 중요성이 크게 약화되었다. 다만 이 방면에 위치한 역들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도원역이 중심이 되어 도원도(桃源道)로 편성되었으나, 조선시대 도원도의 관할 범위는 고려시대의 도원도에 비해 훨씬 축소되었다. 개성에서 서쪽으로 벽란도(碧瀾渡)와 해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산예역(狻猊驛)이 위치하였으며, 남쪽의 풍덕·강화 방면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는 중련역(中連驛)이 위치하였다. 두 교통로 역시 고려시대만큼의 비중을 갖지는 못하였다. 산예역과 중련역은 모두 영서도(迎曙道)의 소속 역으로 편제되었다. 개성 시내의 경우, 조선시대에도 십자가가 개성 시가지의 중심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십자가와 남대가라는 지명은 더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다. -
개성의 성곽
【목차】 º 개설 º 궁궐의 담장, 궁성 º 황제의 성, 황성 º 국도를 지키는 성, 나성 º 조선의 성곽, 내성 【개설】 고려 국도의 보호를 위해 개성의 자연 지세를 수용하여 세운 여러 성곽 체제이다. 그 범위는 도내(都內)와 4교(郊)로 구별되었다. 도내에는 궁궐을 중심으로 궁성(宮城), 황성(皇城), 나성(羅城)의 3성 체제로 운영되다가, 1394년(조선 태조 3)에 내성(內城)을 축조하였다. 개성의 지형은 송악산(松嶽山, 489m), 오공산(蜈蚣山, 204m), 용수산(龍岫山, 177m), 덕암봉(德巖峰, 108m), 부흥산(富興山, 156m)으로 연결되는 구릉들이 서로 연이어져 있었다. 성곽은 이러한 자연지세를 그대로 수용하는 가운데 구축되었다. 【궁궐의 담장, 궁성】 궁성은 본궐(本闕)을 둘러싼 성곽이다. 궁궐은 919년(태조 2) 철원에서 개성으로 천도했을 때 후고구려의 궁궐을 이용하여 창건한 것으로 파악되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개성을 황도(皇都)라 하고, 그 이듬해 4월 ‘수영궁궐도감(修營宮闕都監)’을 설치하여 963년(광종 14) 6월까지 약 2년 동안 궁궐을 수리하였다는 자료가 있다. 이는 고려초기의 정치적 격변을 극복하면서 개성의 위상도 점차 갖춰 갔음을 의미하고, 궁성 또한 재정비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궁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궁궐의 담장에 지나지 않았다. 평소 그저 담장이었던 궁성이 제 기능을 발휘한 것은 정치적 변란이 일어났을 때이다. 【황제의 성, 황성】 황성은 궁성 및 그 밖의 국가 시설들을 둘러싼 성곽이다. 황성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자료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다. 『고려사』에서는 그 둘레가 2,600간(間)이라는 것과 20개의 성문 이름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이를 내성(內城)이라고 하였고, 왕궁 및 계림궁(鷄林宮)·부여궁(扶餘宮) 등의 별궁과 상서성(尙書省)·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팔관사(八關司) 등의 관청을 에워쌌다고 하며, 성문 중에서 정문인 광화문(廣化門) 이외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황성의 모태가 되었던 성곽은 송악산을 주산으로 해서 쌓은 발어참성(勃禦塹城)이었다. 이 성곽은 태조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신라후기에 유행했던 도참(圖讖) 사상을 근거로 궁예(弓裔)를 달래어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松嶽)에 쌓은 성곽이었다. 황성의 범위에 대해서는 『고려사』 및 북한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발어참성의 하반부로 보는 견해와 고려초기에는 발어참성의 범위를 그대로 이용하다가 1029년(현종 20)에 나성의 완성으로 변화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 견해가 있다. 【국도를 지키는 성, 나성】 나성은 개성의 외성(外城)이며, 궁성과 황성 및 일반 거주지인 5부방리(部坊里) 등을 포괄했던 성곽이다. 이는 1009년(현종 즉위)에 축성 논의가 있은 이후, 1010년(현종 1)과 1018년(현종 9)의 두 차례 거란 침략, 1014년(현종 5)의 김훈(金訓)·최질(崔質) 등의 반란 등 대내외적인 상황으로 공사가 늦춰졌다. 1019년 2월에 거란 침략을 격퇴한 이후 1020년 8월에 대대적인 궁궐의 수리와 강감찬(姜邯贊)의 건의에 따라 활발하게 추진되다가, 1029년에 비로소 완성되었다. 고려 건국을 계기로 궁성과 황성이 정비되었던 반면, 나성은 110여 년 이후에 축조되었다. 그것은 후삼국 통일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고려초기의 상황에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일으키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개성에는 후고구려의 국도로서 일찍부터 그 시설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고려전기의 정치 상황이 개경세력을 주축으로 정치권력이 안정되지 못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국도의 대안으로 계속해서 제기되었던 서경(西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점도 아울러 고려될 수 있다. 따라서 나성의 완성은 100여 년 동안 꾸준하게 정비되어 오던 도성 정비의 마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성곽, 내성】 내성은 황성과 나성 사이에 있었던 성곽이다. 북한의 연구성과를 통해서 보면, 북쪽과 서쪽 성벽은 기존의 나성 성벽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남쪽과 동쪽 성벽은 돌로 새롭게 쌓은 것이었다. 현재 북쪽과 동북쪽 성벽의 석성(石城) 부분이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성은 황성과 나성의 기능을 보완한 것이라기보다는 군사적인 면이 강조된 것이었다. 내성은 1391년(공양왕 3)에 공사가 시작되어 1394년(조선 태조 3)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내성은 고려왕조의 멸망과 한양(漢陽) 천도에 따라 그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내성은 멸망한 고려왕조의 상징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조선초기의 정치적인 동향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던 얄궂은 운명을 간직하기도 하였다. 현재 개성시 중심네거리에 위치한 남대문(南大門)은 그 역사의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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