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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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제이(주)
일만제이(日滿製飴)주식회사는 1942넌 5월 28일에 설립됐다. 공장은 당시 주소로 일지출정 295번지에 있었다. 일만제이주식회사 인천공장의 주소는 일선염공(日鮮染工) 주식회사 인천공장의 주소와 같다. 같은 부지 인근에 있었거나 시기를 달리하여 같은 장소에 설립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사 대표는 다케우치 시게노리(武內重敎)였고, 이사는 미야모토 시게토라(宮本重寅), 야나기와라 시게오(柳原茂雄), 구보다 마츠스구(久保田松次), 감사는 사사키 진베에(佐佐木甚兵衛)였다. 일만제이주식회사는 각종 과자류를 제조하는 회사였으며, 현재 공장 터 인근에는 홈플러스 인하점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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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농약(주) 인천공장
일본농약 주식회사 인천공장은 일제강점기 인천부 학익정 401번지에 설립됐다. 본점은 경성부 중구 황금정 2정목 128번지에 위치했다. 설립일은 1942년 5월 14일이다. 광복 후 조선농약으로 운영되었고, 근래까지 한국농약 인천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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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치제작소/일립제작소(주) 인천공장
일립제작소는 1910년 일본 이바라키현(茨城県) 히타치시(日立市)에서 창립된 회사다. 설립자인 오다이라 나미헤이(小平浪平)는 일본 쿠하라 광업소(久原鑛業所) 내에서 수리공장을 운영하다가 1920년 주식회사 히타치제작소로 독립했다.
일립제작소 인천공장은 1940년 무렵에 완공됐으며, ‘일지출학익공업용지(日之出鶴翼工業用地)’에 위치하였다. 경성화학공업주식회사 인천공장과 맞붙어 있었고, 최근까지 대우일렉트로닉스 인천공장 부지로 사용되다가 SK스카이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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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공업/전중공업(주) 인천공장
전중공업주식회사(田中工業株式會社) 인천공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학익정 429번지에 설립된 공장이다. 본점은 경성부 황금정 1정목 54번지에 있었다. 전중공업주식회사(田中工業株式會社)의 대표는 다나카 헤이자부로(田中平三郞)이고, 이사는 마치노 신지로(町野伸次郞), 후지타 카오루(藤田馨), 구로다 테루오(黑田輝夫), 타니가와 하루츠구(谷川治二), 카기타니 준조(鍵谷順三), 다나카 후사노부((田中芳信), 감사는 고지마 헤이시로(兒島平四郞), 카기타니 류이치(鍵谷隆一) 등이었다. 볼트, 너트, 리벳, 이음매판[繼目板], 와이어 등의 제조 가공 및 판매를 하던 회사였으며, 전중공업주식회사(田中工業株式會社) 인천공장 자리에는 현재 학익풍림아이원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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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섬유(주) 인천공장
제국섬유주식회사(帝國纖維株式會社)는 마(麻)와 인견, 기타 섬유와 섬유 제품을 생산하는 제조공업체이다. 일본제마와 북해도제마가 합병하여 1907년 제국제마주식회사(帝國製麻株式會社)를 설립하였으며, 1941년에 제국섬유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본사는 도쿄시 니혼바시구(日本橋區) 무로마치(室町) 1정목 1에 있었고 조선 지점은 경성부 태평통 2정목 102에 두고 있었으며 공장은 부산과 인천에 두었다.
제국섬유주식회사의 전신인 제국제마주식회사는 조선총독부의 아마 증산 계획에 따라 1930년대 후반 당시 군수공업단지로 조성되고 있었던 인천부의 외곽인 학익정 일대에 공장 부지를 조성하였다. 제국제마에서 생산하는 직물은 군복이나 군수차량 등에 쓰이면서 군수물자로 취급되었다. 한편 제국제마의 인천공장 설립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이 전시체제로 전환되자 각종 통제로 인해 공장 확충이나 노동 조건이 불리해지면서 공장들이 조선으로 이전해오던 상황과도 관련된다. 대체로 이 때 이전한 공장들은 일본에서의 유휴 면방 설비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대부분 노후한 설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제국제마주식회사 인천공장 부설 예정지인 학익정은 인천부 1차 부역확장 예정지로 공장용지로 조성되고 있었으며 제국제마 인천공장의 주변으로 일본농약(주), 전중(田中)공업(주), 오타후쿠면(주)의 공장들이 조성될 예정이었다. 제국제마주식회사의 공장은 약 6,500평에 해당하는 규모로 건설비 약 200만원으로 1940년도에 준공 예정이었다. 1941년에는 공장의 근무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택도 공장의 북쪽에 조성하였다. 총 31동 61가구의 규모로 서쪽은 일본인 사택지로 공장장, 과장, 직원, 역부, 공원(工員)이 머물렀고, 동쪽은 조선인 사택으로 반도공원(半島工員), 반도합숙소(半島合宿所)로 나뉘었다. 그 외에도 공원구락부, 욕탕이 있었다. 공장 건물은 학익동 719번지로 현재 동아풍림아파트 일대에 해당하며 사택 건물은 학익동 260번지와 420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인천공장은 1942년 11월에 조업을 시작하였다. 조업 초기에는 마방적기 7,388추, 면방적기 10,856추, 직기(織機) 132대가 있었는데, 해방 직후 설비는 방기(紡機) 4,480추만이 남아있었다. 해방 직후 적산으로 처리되어 미군정이 접수한 인천공장은 민간에게 불하되면서 조선제마주식회사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많은 공장들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장 자주화 운동과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 등 관리인과 노동자 간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공장의 관리자가 계속 변경되다가 1949년 10월 정부가 방적관련 사업체 통합 운영 방침을 세우면서 동양방적공사 학익공장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남은 기계마저 소실되었고, 1952년 9월에 종업원 대표에게 불하되었다. 인천공장은 1953년에 다시 조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해에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의 흥한재단에 인수되면서 흥한방적주식회사의 공장이 되었다. 공장은 1953년 정부보유달러로 들여온 방기를 받아 1954년 10,368추의 방기를 보유하였다.
그러나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1960년대 공매에 오르다가 공장의 일부는 1972년 경인직물에 인수되어 한일방직이 되었고, 일부는 1973년 화신레나운의 공장으로 운영되었다. 1999년 한일방직의 상장폐지로 공장 부지는 현재 동아풍림아파트가 조성되었고, 화신레나운은 1981년 동일방직에서 인수, 동일레나운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2010년 학익동 엑슬루타워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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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직금강점(합) 인천공장
동직금강(銅直金綱)은 경성부 봉래정 4정목(4丁目) 111번지에 본점이 있었으며 1940년에 인천공장을 착공하였다. 당시 주소는 학익정 460번지였으며, 현재 인하대학교 기숙사 자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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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화학공업(주) 인천공장
경성화학공업주식회사는 일본 오사카(大阪) 오자키(尾岐)에 본사를 둔 관서(關西)페인트가 조선에 설립한 회사다. 본점은 경성(京城)에 있었고, 인천공장은 당시 인천부 일지출정(日之出町)에 있었다. 현재 용현동 611번지 일대다.
경성화학공업주식회사는 1939년 11월 10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자본금은 300만 엔으로 하여 인천에 부지 5만 평으로 매수해 설립하고, 주식은 관서페인트가 인수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신설 회사의 사장은 이와이 유지로(岩井雄二郞), 상무는 카노 히코기치(鹿野彦吉)가 맡기로 하였다. 창립총회 직후 곧바로 공장 건설 공사가 시작됐으며, 1941년 11월 5일에 낙성식이 개최되었다.
경성화학공업주식회사의 영업목적은 1. 안료 및 도료의 제조 기타 유지 공업 2. 도공(塗工) 공사 청부업 및 이에 부대하는 사업을 경영 3. 영업에 관계하는 원료를 얻기 위한 광산의 개발 및 식림 경영 4. 영업의 도합에 의한 유가 증권을 소유하고 자금의 융통을 위한 사업 등이었다.
경성화학공업주식회사는 광복 후 미군정이 관리하였으며, 유명환 등 3인이 공동 관리 형태로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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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전기제작소(주) 인천공장
조선중앙전기제작소(주)는 1939년 4월 28일에 설립되어 당시 주소인 인천부 학익정 510에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 이듬해인 1940년부터 조업을 시작했다. 조선중앙전기제작소(주)는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중앙전기제작소의 방계회사로서 설립되었다가 1942년 삼릉전기(三菱電氣)에 매각되었다. 일반 전기 제기계 기구 및 재료의 제조 및 판매, 제반 전기 공사의 청부 등을 목표로 하여 운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