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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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한방적㈜
흥한방적(興韓紡績)은 해방 이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었던 제국제마주식회사를 모체로 한 섬유 제작 기업이다. 제국제마는 1930년대 후반, 일제가 학익정(지금의 미추홀구 학익동) 일대에 조성한 대규모 공업용지에 입주한 일본 기업 중에 하나이다. 당시 학익정에는 제국제마를 비롯하여 일선염공, 오타후쿠와타, 히타치제작소, 조선중앙전기제작소, 다나카공업, 일본농약 등 일본 기업들이 들어섰다. 그 중 제국제마는 지금의 학익사거리를 기준으로 남서쪽에 공장, 북서쪽에 사택을 건설하였다.
제국제마 인천공장의 설립과 운영에 대해서는 1959년 제국제마에서 편찬한 『50년사』에 상세하다. 제국제마는 1907년부터 북한에서 아마(亞麻)를 재배하기 시작하여 일본 공장으로 공급하였다. 1934년 부산부에 제포(製布) 공장을 마련하였으나 일본에서 원료를 가지고 와 가공하는 형태였고 규모도 작았다. 원료 수송의 문제와 제품의 현지화 요청으로 인하여 제국제마는 조선에 공장을 신설할 계획을 세운다. 군 당국과 인천부의 후원을 받은 제국제마는 1939년 부지를 매입하여 인천공장 조성을 시작하였다. 1940년 4월 경성지점 내에 인천공장 건설사무소를 설치한 제국제마는 1942년 4월 인천공장 제1기 공사를 완료하고 아마(亞麻) 방적을 위한 정방기(精紡機)를 두고 조업을 시작하였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군용 마 제품의 수요가 많아진 반면, 심각한 자재난으로 인하여 인천공장 제2기 공사가 지연되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조선산 대마(大麻)를 원료로 하는 제강(製綱)공장으로 바꾸려다가 청주에 제강공장을 신설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인천공장 제3기 공사로 전환하여 면방기(綿紡機)와 평직기(平織機)를 설치하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적산으로 적산(敵産)으로 분류된 제국제마는 정규성(丁奎成)이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949년 동양방적 학익공장으로 편입되었으나, 이내 6ㆍ25 전쟁이 발발하여 많은 피해를 보았다. 1951년 11월부터 공장은 일부 가동되었고, 1952년 9월 종업원대표 장용운(張龍雲)에게 2,821만환(圓)에 불하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53년 2월 박흥식(朴興植)이 대표로 있는 흥한재단에서 인수하여 이종현(李宗鉉)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방기 10,368추와 직기 132대로 조업을 개시하는 한편 자본금 5,000만환의 흥한방적(興韓紡績)으로 발족하였다.
하지만 흥한방적의 운영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1956년 운크라 자금을 배정받기로 결정되었으나 수입 태세로 1957년 다른 기업에게 양도하게 되었고, 이어 임금 체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또한 사장 이종현씨가 흥한방적 명의로 개인을 비롯하여 50여곳에서 대출을 받고 갚지 않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지속되는 경영난을 겪던 흥한방적은 결국 1967년 산업은행에서 부동산의 처분을 권고하게 이른다. 이에 따라 같은해 11월 공매가 시도되었지만 유찰되어 다시 공매가 진행되었다. 이어 1971년과 1972년에는 공장 북쪽에 위치한 흥항방적의 사택에 대한 공매 공고가 게재되기도 했다.
결국, 1972년 8월 1일 흥한방적은 폐업계를 냈다. 경인직물(京仁織物)을 운영하던 원성환(元聖煥)은 경영악화에 시달리던 흥한방적을 인수하였다. 그는 공동 출자자 김서암(金瑞岩)과 더불어 부실기업인 흥한방적으로부터 정방기(精紡機) 11,200추를 매입하고 상호를 한일방직(韓一紡織)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한일방직은 1999년 2월 상장 폐지되어 퇴출되었다.
한편 1972년 10월, 흥한방적 사장이었던 박흥식이 운영하던 화신산업에서 일본 레나운과 제휴하여 숙녀복을 생산하는 합작공장 건립을 구상하였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재벌 재기의 포석’이라 보도하기도 하였다. 1973년 6월 합작사업계획 및 기술제휴계약을 체결하였고, 10월 51대 49의 비율로 비용을 투자하여 학익동에 공장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기존 흥한방적의 일부를 공장 부지로 사용하여 1973년 11월 13일 화신레나운을 발족하였고, 12월 30일 공장을 준공하여 1974년 1월 20일부터 제품 생산에 돌입하였다. 1981년 2월 25일 동양방직에서 화신레나운을 인수하고 동일레나운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공장 부지, 산업 종류, 사택의 연속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일제강점기 제국제마주식회사가 있었던 공장 부지를 6․25 이후에도 재건하여 공장 부지로 이용하고 있고, 산업 또한 섬유 사업으로 동일하며, 공장 건너편에 있던 사택도 여전히 사택으로 기능하였다는 점이다. 현재 공장 부지는 모두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길 건너편 사택 중 일부는 아직까지 남아있다. 또한 사택이 있던 자리 앞쪽에는 동일레나운에서 운영하는 하이패션아울렛이 들어섰다. 결국 일제강점기 학익동에 들어선 ‘섬유산업의 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23년 제국제마 사택이 재개발로 인하여 철거를 시작하여 이곳에서 섬유산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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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제철㈜ 인천공장
현대제철 인천공장은 1941년 조선이연금속(朝鮮理硏金屬)(이후 종연공업(鍾淵工業) 주식회사 인천공장에서 유래하였다. 광복 후 1948년 6월 종연공업이 귀속재산으로 처리되며 임시로 상공부 직할 대한중공업공사로 새롭게 탄생하였지만, 관련 자료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공장을 유지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1951년 6월, 정부의 국무원고시 제13호로 대한중공업공사는 상공부 직할 공장에서 국영기업체로 지정되었고, 1952년‘철강업 재건계획’이 수립되며 전쟁으로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는데 주력하였다. 또한 부흥산업의 일환으로 선결되어야 할 주택건설업을 위하여 함석과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한 대한중공업공사의 제강사업 건설공사계획을 추진하여, 1953년 6월 10일 부산에서 국영 대한중공업공사를 창립하였다. 당시 토지는 공장부지 34,203평·사택부지 1,583평과 저수장이 있었다. 건물과 설비는 공장 9동 2,032평·창고 3동 1,332평, 사무실 1동 150평·사택 34동 1,313평·기타 건물 14동 349평·부대설비 18동이 있었다.
1953년 11월 17일 평로공장·중형압연공장·박판압연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여, 1956년 11월 15일 평로공장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설비는 국제입찰을 통해 서독 DEMAG사에서 들여왔는데, 평로는 50톤 규모의 고정식 염기성평로로 길이 10.5m, 폭 3.7m였다. 압연공장은 평로공장 건설이 시작된 1954년 7월 1일 분괴·중형압연 공장 설비를 위한 기초공사가 실시되었고, 설비 역시 DEMAG가 설계하였다. 그러나 이 공장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59년 12월에 준공할 수 있었다. 박판압연 공장 역시 지체되어 1959년부터 본격적인 공장 건설이 시작되어 1960년 4월 1일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공장의 기술자들은 1956년 1월 해외에 파견하여 연수를 받았고, 공장 가동 직전은 9월에는 평로조업요원 270명을 채용하여 서독 기술진과 함께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로 평로공장이 정상조업을 시작한 지 약 1년 후에는 10명의 기술진이 서독 DEMAG로 해외연수를 떠나 8개월 정도의 현지 훈련을 실시하였다.
대한중공업공사는 기업체로 법인격을 갖추기 위하여 1961년 6월 회사법에 대한 초안을 상공부와 재무부에 제출하였다. 그동안 귀속재산처리법으로 관리되는 기업체로서 公社도 일반 회사도 아닌 불분명한 상태였다. 그 후 1962년 8월 13일 법률 제1123호로 「인천중공업주식회사법」이 공포되며, 대한중공업공사는 주식회사로 전환되어 정식 회사 명칭인 인천중공업주식회사로 새롭게 태어났고, 11월 10일 정식으로 회사 설립 등기를 완료하였다. 주식회사로 전환된 인천중공업㈜는 자본금 14억원으로 전액 정부가 출자하였다. 따라서 정부 소유 주식에 대한 배당은 없으나, 대통령의 승인으로 매각할 수 있는 조항이 명문화되어 불하 가능성을 명시하고 있었다. 초대 대표이사로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김성은(金聖恩)이 선임되었으나, 이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며 역시 군 출신인 안춘생(安椿生)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1년 7월 22일 발표된‘5개년 종합경제재건 계획’에 따라 국내외 민간기업의 철강산업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국영기업체인 인천중공업㈜을 불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재일동포 기업가인 조일제철(주) 대표 신학빈(申學彬)이 사업계획서를 제출하자, 이에 반대하는 한국철강공업협동조합이 뛰어들며 공모 기간 연장을 요청하는 등 인천중공업㈜을 불하 둘러싸고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후 1964년 정부는 종합제철사업 추진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이때 김종필과 함께 민주공화당 창단준비위원으로 활동하던 대한양회의 이동준(李東俊)이 인천중공업㈜ 불하를 전제로 제철사업에 뛰어들며, 인천제철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인천제철㈜는 설립 당시 자본금 1억원으로, 10만주(주당 1,000원), 불입자본금 75,000주, 총 7500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
1965년 6월 정부는 인천중공업(주)을 특정기업에 불하하지 않고 증권시장에서 주식 공매를 통해 민영화한다는 새로운 방침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1966년 8월 29일 인천중공업㈜는 주식공매를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그전부터 인천중공업㈜을 인수하려던 인천제철㈜은 주식공매와 함께 인수에 나서 51.9%를 확보하며 인천중공업의 최대 주주가 되었고, 이를 통해 인천제철㈜과 인천중공업㈜은 생산체제를 연결하는 일관생산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1967년부터 생산량 증가에 비해 판매가 원활하지 못하여 과다한 재고를 발생하였고, 인천제철㈜의 자금운용 정책인 인천중공업㈜ 경영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부채 증가와 잉여금 감소로 인한 자금압박으로 경영이 침체 국면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1969년 3월부터 부실기업에 대한 정리방침에 따라 1969년 12월 29일 두 회사는 합병을 결정하고, 송요찬을 대표로 하는 인천제철㈜로 새롭게 출발하였다. 육군참모총장과 내각수반을 지낸 송요찬이 대표로 취임하자 정부는 인천제철㈜의 은행부채를 정부투자로 전환하는 조치로, 회사의 자금 압박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1978년 초 정부는 산업은행 출자 관리기업 7개 가운데 경영 실적이 호전된 인천제철㈜ 등 4개 기업을 불하, 민영화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인천제철㈜의 불하설이 확정되자, 제2제철소 건설과 함께 그 인수를 둘러싸고 각축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공매입찰에는 현대중공업과 방계회사인 현대종합기술개발주식회사가 함께 입찰서를 제출하여 최종적으로 현대그룹이 인천제철㈜을 인수하게 되었다.
1948년 6월 10일 대한중공업 공사로 발족
1953년 11월 19일 제강시설 건설공사 착공
1956년 11월 15일 평로공장 조업개시
1959년 12월 9일 分塊·중영압연공장 조업개시
1960년 4월 1일 박판압연공장 조업개시
1962년 6월 1일 아연도금공장 조업개시
1962년 9월 26일 소형압연공장 조업개시
1964년 11월 10일 인천중공업 주식회사 설립
1966년 3월 1일 서독 DEMAG/LURGI 공동체와 제철시설 도입계약
1966년 8월 30일 기초공사 착공
1966년 12월 20일 인천중공업 산소공장 준공
1966년 12월 31일 인천중공업 민영화
1968년 12월 15일 인천제철 공장 건설 완료
1968년 12월 27일 인천제철 전기제강로 조업개시
1969년 2월 27일 인천제철 예비환원로 조업개시
1970년 4월 1일 인천중공업을 흡수합병
1970년 10월 16일 예비환원로·전기제선로 공장 준공
1970년 10월 29일 전기제선로 폭발사고
1972년 5월 31일 연속식 제3소형 압연공장 준공
1973년 6월 30일 전기제강로 공장 완공
1973년 매립지 42,659평 매입
1974년 11월 선재압연공장 건설
1975년 1월 산소공장 준공
1975년 5월 제5소형 압연공장
1975년 10월 인천합금철(주) 설립
1978년 10월 선재공장 확장
1979년 3월 60톤 전기로 공장 건설
1980년 9월 H형강 공장 건설
1983년 2월 주단강 공장 건설
1983년 3월 공유수면 매립(고선박 해체사업)
1990년 3월 스테인리스 냉연공장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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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엠㈜
한국지엠㈜ 부평공장은 1937년 부평에 설립된 조선국산자동차㈜로부터 이어지는 자동차 제조 공장이다. 일제강점기 부평에 자동차 부품 공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시 설립된 회사 이름이 ‘조선국산자동차(朝鮮國産自動車)’였기에 한국산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 회사 소유의 ‘조선에 위치한’ 공장에 지나지 않았고, 식민지 현실에서 ‘국산’ 또한 한국산이 아닌 일본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37년 7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조선국산자동차㈜ 관련 내용이 상세하다. 이 기사에 따르면 조선국산자동차(주)는 1937년 봄에 영업을 개시하였는데, 도쿄 가스전기공업(東京瓦斯電氣工業)㈜로부터 완성차 판매를 할당받은 일종의 자동차 판매회사였다. 영업 개시 당시 200대의 판매할당을 받았으나, 같은 해 7월에는 할당량을 150대 늘렸다. 또한 도쿄자동차제조(東京自動車製造)㈜의 소형자동차 쓰쿠바호(筑波呉)의 판매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애초 조선국산자동차㈜는 완성차 판매회사였으나, 설립 초기부터 자동차 생산에 대한 의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7년 10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 조선국산자동차㈜는 창립초부터 제작에 목표를 갖고 있었고, 자동차 제작 공장 건설에 대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보도하였다.
조선국산자동차㈜가 부평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8년의 일이다. 1938년 2월, 조선국산자동차㈜는 부평역 부근에 20여만 평의 공장부지를 매수하였다. 한편 같은 해 4월 도쿄자동차공업㈜와 조선국산자동차㈜의 합병 문제가 제기된다.
도쿄자동차공업㈜는 1937년 4월 일본의 자동차공업㈜와 도쿄 가스전기공업㈜가 합병하여 출범한 회사로 군용 트럭을 위주로 제조하고 있었는데, 조선국산자동차㈜에서 매수한 부지에 승용차 제조 공장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1939년 두 회사의 합병이 이루어졌는데, 부평에는 당초 계획과 달리 자동차 완성품을 제작소가 아닌 자동차용 스프링 공장이 건립되었다. 지금의 산곡동 미산초등학교 자리다.
한편 1941년 4월, 도쿄자동차공업㈜는 디젤자동차 전용허가를 받고 디젤자동차공업㈜로 개칭하였다. 1943년 디젤자동차공업㈜는 공장과 사택을 건립하였다. 지금의 부평동 부평고등학교 일대다. 2014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서 편찬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국산자동차㈜와 디젤자동차㈜의 사택은 각각 15동, 10동 규모로 공장 인근에 만들어졌는데, 조사 당시 조선국산자동차㈜ 사택이 5동, 디젤자동차㈜ 사택이 2동 남아있다고 보고하였다.
1962년 8월, 새나라공업㈜이 조선국산자동차㈜ 공장 부지에 현대식 자동차 조립공장을 설립하여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문제와 생산 공장의 문제로 인하여 설립된 다음해 7월에 문을 닫았다.
1965년 신진자동차공업㈜는 파산한 새나라공업㈜를 인수하여 일본 도요타와 기술 제휴를 체결하였다. 신진자동차공업㈜은 약 1백65만㎡의 규모의 자동차 제조공장을 세우고 코라나, 크라운, 퍼플리카 등의 승용차를 조립 생산하였다. 1972년에는 미국의 지엠(GM)과 공동으로 자본금을 출자하여 지엠코리아(GMK)를 설립하였는데, 석유파동 등으로 경기가 어려워졌다. 신진자동차공업㈜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1976년 산업은행이 한국 측 지분을 인수하여 새한자동차㈜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83년 대우그룹에서 재인수하며 대우자동차㈜로 거듭났다. 1992년 지엠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자적인 개발과 생산을 이어가다가, 2002년 다시 GM과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GM대우오토앤테크놀로지㈜를 출범하였다. 당시 부평공장은 대우인천자동차㈜로 분리되었다가 2005년 다시 인수합병되었다. 2011년 한국GM으로 사명을 바꾼 후, 한국GM의 부평공장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한국GM 홈페이지에서는 부평공장을 ‘한국GM의 본산(本山)’이라고 표현함과 동시에 ‘국내 최초의 현대식 자동차 공장’이라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GM 부평공장의 철수 문제가 언론에 등장하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공장인 부평2공장이 폐쇄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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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리공업㈜
한국유리공업 주식회사 이전부터 만석동 일대에는 유리 생산 공장이 있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가장 이른 유리공장은 인천초자제조소이다. 1920년대 조선인에 의하여 만석정 46번지에 세워진 인천초자제조소는, 이후 공장 위치는 그대로인 채 경영인만 계속 바뀐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1930년 만석동에 있던 유리공장이 모두 폐업하는 가운데 인천초자제조소만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인천초자제조소는 각종 유리병과 유리그릇 등을 제조하며 1일 205다스 정도의 유리부품을 생산했고, 인천부내, ,강화도, 충청남도 일부, 만주로 수출하였다.
해방 이후 1949년 기준으로 인천초자제조소와 조선초자제조소가 눈에 띈다. 인천초자제조소는 경성에 사무소를 두면서 여전히 만석정 46번지에 공장이 있었다. 1956년에는 같은 주소에 인천초자공업과 동방초자공업사가 있었다. 이들 회사의 폐업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석동 일대에서 유리산업이 꾸준히 이어져왔음은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국내 유리 공업은 기술과 원자재 부족으로 파유리 재생에 주력했으며, 생산 제품 역시 병 유리에 한정되었다. 이마저도 한국전쟁 이후 병 유리 생산이 중단되었고 휴전 이후에서야 공장을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한국유리공업의 전신 인천판유리공장의 설립 배경에는 전후 복구사업이 있었다. 전후 복구에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비재의 생산이 중요했지만 재건사업에 필요한 기간산업 시설의 확보도 시급했다. 판유리 생산 역시 중점 사항이었다. 판유리는 유리 제품 중 판상으로 제조된 것을 총칭하며, 주요 건축 자재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국내 판유리 생산은 전무했으며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1955년 말 전국 유리공장의 수는 41개였지만, 대부분 파유리 재생만 가능한 소규모 공장이었고 판유리 생산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 무렵 복구 작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기구가 유엔 산하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이었다. UNKRA에서는 농업 증산과 산업 부흥에 필수적인 ‘3대 기간산업’으로 비료‧시멘트‧유리를 지정하여, 그 생산 공장의 건설과 불하 계획을 세웠다. 이에 UNKRA 자금 2백만 불로 인천에 판유리공장을 설립하기로 협의하였고, 1953년부터 UNKRA 및 FOA 자금이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54~1956년 공장 부지 및 건설업자 선정, 공사계약 체결, 공사 착공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인천판유리공장의 위치는 대한석탄공사의 인천 저탄장 자리였던 만석동 1번지로 결정되었다. 이곳에는 114세대의 판자촌이 있었으나 공장 건설 부지로 결정됨에 따라 철거 과정에서 마찰이 있기도 하였다. 인천판유리공장 인수는 공개 입찰로 진행되었고, 1957년 대한유리공업주식회사기성회 최태섭이 실수요자로 결정되어, 1957년 3월 11일 ‘인천유리공업 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인천유리공업은 연간 12만 상자의 생산 규모를 갖춘 공장으로서 UNKRA 자금 362만 불, 한화 6억 원이 투자된 한국 최초의 판유리 공장이었다. 1957년 9월 준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하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인천유리공업은 판유리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던 풀콜식(Fourcault process) 공법을 도입한 공장이었다. 풀콜식 공법은 탱크로의 유리물 수면에 데비튜스(3m 길이의 가는 홈이 파인 내화물)를 넣고, 데비튜스 홈을 통해 유리를 끌어올린다. 냉각탑은 약 7m 높이이며 판유리는 20여 개의 석면이 피복된 롤러로 올린다. 유리는 탑의 끝부분에 있는 원판실에서 완전히 냉각되고 크기에 맞춰 절단된다. 이후 인천유리공업은 ‘한국유리공업 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고, 창유리‧금망유리‧형유리‧서리유리‧모서리유리 등 다양한 판유리를 생산하였다. 그러한 동시에 만석동 부두 이래의 월남피난민촌을 매수‧철거해가면서 공장의 규모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1960년대 이후 한국유리공업은 정부의 지원 아래 지속적으로 성장해나갔다. 이 시기 정부에서는 단계별로 경제개발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을 모색하였고 이어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는 자급자족 경제 달성을 주목적으로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를 통하여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산업구조를 재편, 고도화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하였다. 이에 중화학공업 기업 지원에 적극적이었고 유리산업에서도 유리 수입을 금지하면서 최대한 기업의 편의를 보장하였다. 유리 수입이 금지되자 한국유리공업에서 국내 유리 공급을 독점할 수 있었다. 당시 유리의 수요량에 비하여 공급량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국유리공업은 폭리를 취하며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생산시설을 대폭 증설했던 1962년 이후 10여 년 동안 한국유리공업은 공장 증설, 자본금 증대, 경쟁사 합병 등을 통하여 안정적인 성장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당초 판유리 중심의 1공장의 생산체제에 불과했는데, 이 시기에 판유리공장 증설, 동성판유리 부산공장 인수를 통해 양적으로 팽창하는 한편, 생산 제품 종류도 관유리‧안전강화유리까지 다양화함으로써 질적 도약을 이루면서 종합유리제조기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1973년까지 한국유리공업은 판유리공장 5개로, 관유리 4개로, 유리블록공장, 크리스마스 장식용 전구 시범공장 등을 확보하면서, 연간 160만 상자의 판유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국내 수요량이 연간 150만 상자였으니, 한국유리공업은 국내 유리 공급을 좌지우지하는 지위에 있었다. 한편. 이 기간에 미국과 월남, 태국, 멕시코 등지로 수출하며 판로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도 한국유리공업은 인천공장 외에도 부산과 군산, 구미 등지에도 공장을 설립하면서 성장일로를 걸어나갔다. 인천공장에서 있었던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1986년 글라스울 공장의 건설이 있었다. 글라스울은 1980년대 대표적인 건축용 단열재로, 한국유리공업은 프랑스 상-고방 그룹으로부터 생산기술을 도입하여 대량 생산에 나서기로 하였다. 이에 인천공장 판유리 3로가 있던 자리에 글라스울 공장을 건설하여 연간 5,000톤 규모의 생산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후에도 글라스울 수요가 증가하자 이에 발맞춰 인천공장 판유로 5로 자리에 글라스울 제2공장을 건설하여 1994년부터 생산에 돌입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한국하니소’라는 별도의 법인을 설립, 분리해나가서 더욱 본격적으로 글라스울 사업을 추진하였다.
한편, 한국유리공업 인천공장에서는 1960년대와 1980년대 대규모 파업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1964년 한국유리공업의 임금 수준을 보면, 월평균 임금이 8,498원이었고, 야간근무수당을 제외하면 7,800원 정도에 불과했다. 다른 유리제품 부문의 종업원 평균 임금이 3,171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임금이 높은 편이었지만, 당시 6인 가족 최저생계비가 9,100원으로 추산되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유리공업 종업원 임금은 최저생계비를 겨우 웃도는 정도였다. 이에 1964년 한국유리 종업원 500명 중 포장, 절단, 창고 종업원 150여 명이 임금 35.6%(2,625원)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특히 이들은 유리 도매 가격이 거의 매분기마다 인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저임금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지적하였다. 회사 측에서는 12.7% 인상안을 제시하였고, 노조의 거부 속에서 일부 간부들이 회사 측의 제시안을 수락하면서 파업이 종결되었다. 그 이듬해 1965년에도 한국유리 종업원들은 노임 2,125원과 퇴직금 66개월 누진분을 요구하며 쟁의를 결의하였다. 이에 노사회의에서 1,100원 인상과 퇴직금 42개월분 지급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조인 과정에서 합의 내용 해석에 이견이 발생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노조 측은 1965년 6월 8일 전면 파업했고, 회사는 직장 폐쇄로 대응하였다. 첨예한 대립 속에서 결국 노동위원회 중재 판정에 따라 4월 1일부로 임금 1,100원을 인상하기로 했고, 퇴직금은 만 20년 기간으로 평균 임금 42개월분을 지급하기로 하며 쟁의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1988년 8월 계열회사였던 한국안전유리에서 전면 파업이 발생하였다. 1985년 한국안전유리를 신설하고 가좌공장을 설립하면서, 소속이 바뀐 종업원들에 대한 처우 문제에서 비롯한 파업이었다. 신설 회사 한국안전유리에 기존의 인천공장 안전유리사업 부문 사원들을 소속을 바꿔서 배치하였는데, 이들 입장에서 종전까지 받아오던 급여와 수당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안전유리의 노조원 508명 중 214명이 당초 한국유리에서 온 사원이었는데, 이들의 요구 조건은 자신들의 처우를 기존에 받아왔던 한국유리 수준에 맞춰달라는 것이었다. 1988년 상반기 9차례에 걸친 단체교섭에도 불구하고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8월 노조 측은 전면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에 회사 측에서도 직장 폐쇄로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러한 대립이 한 달 넘게 이어지며 파업이 장기화되자 양 측 모두 합의를 모색하게 되었고, 결국 3개월분을 보상하는 절충안에 도달함으로써 파업이 마무리되었다.
지속적으로 성장을 이루어왔지만,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판유리 공급 과잉이 심각해지고, 저렴한 외국산 유리가 수입되면서 사업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천공장을 대표하는 시설이자, 이른바 ‘펜버논로’로 불리던 판유리 5로가 1990년 폐쇄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중반 들어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기업 내 다른 공장에 생산 라인을 이전하거나 시설을 아예 폐쇄하는 등 인천공장의 쇠락은 뚜렷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직격탄이었다. 구조조정 끝에 인천공장은 철수하게 되고 현재는 공장 부지였던 곳에서 그 흔적을 거의 찾을 수도 없다. 한편, 인천공장의 모체가 되었던 한국유리공업은 애초 인천유리공업으로 시작하여 회사명을 바꾼 것이었는데, 기업 이미지 쇄신을 위하여 1990년 다시 ‘한글라스’라는 대표브랜드를 창안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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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화학㈜ 인천공장
현재 회사명 코스모화학이 서구 가좌동에 들어온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1964년 「수출 산업 공업 단지 개발 조성법」의 제정을 배경으로,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전반에 걸쳐 중앙정부의 수출주도 공업화 전략과 지역 내 호응이 결합되면서 인천 내에 공업단지 조성이 추진되었다. 이리하여 진통 끝에 주안염전을 매립하고, 현재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과 부평구 십정동, 미추홀구 주안동 일대에 이른바 주안공단이 조성되었다. 1968년 설립된 한국지탄공업 주식회사도 1971년 한국티타늄공업 주식회사로 사명을 바꾸며 본사를 가좌동으로 이전했던 것이다. 이때 들어왔던 한국티타늄공업 공장은 2016년 6월 인천을 떠날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위치해있었으며, 2003년에는 사명을 코스모화학으로 변경하였다.
한국티타늄공업은 오랜 기간 국내에서 이산화티타늄을 생산하는 유일한 기업이었으며, 그 중 아나타제형 이산화티타늄 생산 설비로는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해왔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1971년 생산 설비를 확충함으로써 국내 이산화티타늄 연간 추정 수요 6,300톤을 감당할 수 있게 되면서 전량 국산 공급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8년에도 가좌동 인천공장을 증축하여 그간 수입에 의존해온 섬유‧의료용 아나타제도 생산하는 한편, 나아가 해외 수출도 모색한다고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의 이산화타티늄은 착색력이 뛰어난 백색 안료로서 크게는 우주선이나 전투기에서부터, 작게는 페인트, 타이어, 각종 공구, 신발, 제지, 선크림 등 광범위한 분야에 사용되는 기초 소재이다. 이렇듯 국내 유일의 이산화티타늄 생산 시설로서 국내는 물론 해외로도 판로를 확장하면서 1995년 ‘50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오랜 세월 화학 산업의 중추 역할을 해왔다. 지역 차원에서도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며 주안공단의 주요 기업으로 손꼽혀왔지만, 으레 환경오염과 공해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지역사회에 원만한 관계를 이루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령, 1970년대부터 신문기사에는 인천의 공해 문제에 주안공단의 조성, 특히 한국티타늄공업이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기사들이 등장한다. 일본의 미쓰비시금속에 공해방지 시설을 발주하였다는 기사(『매일경제』, 1975.7.22.)도 있지만, 그러한 내용이 무색하게도 한국티타늄공업은 거의 모든 기사에서 상습적으로 공해를 유발하는 기업으로 강한 의심을 받고 있다.. “북구 가좌동 경인고속도 입구 한국티타늄공장에서도 아황산가스를 뿜어 톨게이트나 외환은행 공단지점 직원들이 큰 불편을 겪고 있으며 …”(『동아일보』, 1975.9.19.)
실제로 환경청은 한국티타늄공업에 공해부과금 5,200만원을 부과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84.12.13.) 여기서 공해부과금이란 허용기준을 초과한 만큼의 오염 물질량에 대한 부과금 단가 가격과 조업 일수를 모두 계산해 납부하도록 하는 것이다. 1989년에도 한국티타늄공업은 공해부과금으로 5,365만원을 납부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한겨레신문』, 1989.9.28.) 이러한 부과가 특이하지도 않을 것이 한국티타늄공업에서는 장마철을 틈타 한강에 허용치를 초과하는 폐수를 하루 1천 톤 이상 방류했던 사실이 또 적발되기도 하였다.(『동아일보』, 1988.8.17.) 심지어 환경청은 “염산이나 황산과 같은 높은 산도의 공업 폐수를 하루 7,500드럼(1,500톤)씩 인천 앞바다에 흘려보낸”사실을 포착하고, 한국티타늄공업이 “폐수처리시설을 갖추고도 가동 경비를 아끼려 제대로 가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밝혀”냄으로써 한국티타늄공업 대표 문승균과 법인체를 환경보전법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도록 인천시에 이첩하기도 한 적도 있었다.(『경향신문』, 1982.9.14.)
그러나 이에 대한 행정적인 처분이나 사법적인 심판이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 환경처에서는 “폐수를 무단 방류한 한국티타늄을 환경보전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10일 간 조업을 정지시키도록 인천시에 지시하였다. 그러나 인천시 관계자는 한국티타늄이 생산하는 산화티타늄은 국내 독점산업이므로 이용도가 방대해 조업 중지를 시킬 경우, 국내 산업에 대한 원료 공급에 차질이 예상돼 경고 처분으로 그쳤다고 해명”하였다는 기사로 미루어 보아, 한국티타늄공업의 상습적인 방류 행각에 행정 당국이 미온적인 태도를 취했고, 자연히 사법적인 심판 또한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인천의 대표적인 공해업체로 꼽혔던 한국티타늄공업은 1995년부터 경상남도 온산공단으로 이전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공해로 인한 민원 문제로 난항을 겪는 가운데 자금난이 겹치면서 온산공장 이전이 불투명해졌으나, 결국 1997년 온산공장을 건립하기는 하였다. 그러한 한편으로 인천공장을 매각하려고 하였으나 온산공단으로의 완전 이전 계획에 차질이 빚어짐에 따라 매각 또한 지연되었고 인천공장 가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 IMF 외환위기로 인하여 회사 경영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신설 온산공장을 제대로 시운전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러 결국 부도를 맞아 1999년 4월 법원으로부터 회사정리절차 개시결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이 되어서야 회사정리절차 종결판정을 받아 법정관리종목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곧 코스모산업 주식회사에 매각됨으로써 회사명 또한 코스모화학 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이후 2015년에 이르러서야 인천공장을 매각하고 그 이듬해인 2016년 완전 이전하게 되었다.
인천공장 철수에 따라 45개에 이르던 공장 건물이 모두 철거되고 40동 한 개의 건물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40동 역시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토박이 지역 유지 주도로 해당 건물을 중심으로 지역 경관 재생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40동 건물이 ‘코스모40’이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였고, 주변의 건물들도 그에 맞춰 상가나 카페, 문화체험공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코스모화학 공장 터를 중심으로 유기적인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코스모40 내부는 공장의 본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한다는 방침하에 재건축되었다. 비록 코스모화학 공장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을 최대한 잘 간직하고 있는 코스모40을 통해서 어렴풋하게나마 해당 지역의 과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지역성의 재창조를 기반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이제는 인천의 대표적인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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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청 인천공작창
1899년 6월 17일 경인철도회사에 의하여 설치된 인천공장은 철도차량 공장의 효시로 꼽히며, 이것이 철도청 인천공작창의 전신이다. 인천공장은 당초 경인철도의 철도차량과 교량거더 등 일체의 공작을 담당하였으며, 1899년에는 최초로 미국에서 도입해 온 모갈형 기관차와 화차를 조립하였다. 이후에도 도입 차량의 조립과 보수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05년 6월 24일 서울의 용산에 철도공장이 설치되었고, 1908년 4월 24일 인천공장은 초량과 겸이포의 철도공장과 함께 용산공장에 합병 운영되었다. 당시 인천공장에는 기관 및 30마력 기기 각 1대 외에 선반[施盤]‧보르반‧형삭반 등 총 20여 대의 설비기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37년 일본차량제조회사가 들어오면서 인천에 다시 철도 관련 공장이 세워졌다. 1908년 경인철도 인천공장이 용산공장으로 흡수된 이후 철도 관련 공장으로서는 일본차량제조회사가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송현동 66번지 매립지역에 자리를 잡았는데 1934년 공유수면매립대장에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시기 일본차량제조회사는 인천공장의 규모를 키우고자 1934년과 1938년 두 차례에 걸쳐 송현동 매립지를 신청하여 부지를 얻었다.
일본차량제조회사는 그 이전부터 조선에 진출해있던 상황이었다. 현재 등록문화재 제426호인 전차 363호(국립서울과학관 소장)와 등록문화재 제467호인 전차 381호(서울역사박물관 소장)를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 두 차량은 모두 일본차량제조회사가 제작한 차량으로 반강제 보기식 궤도차량이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전차 381호는 1929년 모델로, 1968년 11월까지 서울 시내를 운행하던 전차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1937년 전차제작도면을 참고하여 훼손된 부분을 복원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차는 크기가 매우 크기 때문에 완성품으로 수입하기가 힘들었다. 따라서 부품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다시 한번 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일본차량제조회사 역시 기차를 생산할 때 기차 부품을 수입하여 이를 인천공장에서 조립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1945년 광복 이후 9월에 미군정청 교통국은 일제의 철도 업무를 인수하였으나, 미국과 러시아의 남북 분할점령으로 9월 11일부터 남북 간 철도운행이 중지되었다. 또한 1945년 12월 1일 남북 분할과 함께 남한으로서는 철도 시설장비의 약 절반 정도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광복 직후 남한의 철도 시설이나 장비 사정은 매우 열악하여 교통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특히 북한에 비해 철도 인프라가 현저히 뒤처져있었던 터라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1946년 5월 10일, 미군정청은 남한 소재의 철도를 모두 통합하여 공유화하였다. 1948년 6월 2일에는 공유화된 철도공장의 공식 명칭을 철도공작창으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차량제조회사 인천공장은 조선차량회사로 곧바로 바뀌었고 관리인도 선정되었다. 일본인 기술자들이 모두 떠났지만, 그 기술이 유지되면서 1946년에 곧바로 기관차를 출시할 수 있었다. 1946년 1월의 생산을 시작으로 1년간 총 제조 차량 수는 180여 대에 달하였다.
그런데 1947년 여름 조선차량회사 관리인 조희순(曺喜淳)이 1억원 넘게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었고, 결국 배임죄로 기소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논란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이듬해인 1948년 2월 역시 관리인이었던 유재룡(劉在龍)이 횡령사건이 또 일어나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조차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 사건은 관련자 십여 명이 구속되면서 마무리되었다. 당시 미군정청에 의하여 선정된 재산관리인들의 횡령 사건들이 종종 일어나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는데, 조선차량회사에서도 이러한 행태가 반복되었던 것이다.
1950년 조선차량회사가 철도공작창으로 인수되어 10월에 인천공작창으로 발족하였고, 10월 26일 업무를 개시하였다. 1951년 공작창은 서울, 영등포, 인천, 부산에 공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인천공작창의 업무는 주로 기차를 수선하고 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951년 1.4 후퇴의 여파로 부산공작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서울을 재수복함에 따라 같은 해 9월 다시 공작창 직제가 개정되고 인천공작창이 개설되었다.
업무량 감소로 1959년 12월에는 대통령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61년 10월 객화차 신조를 위하여 다시 인천공작창으로 개창되어 1962년 1월 조업을 개시하였다. 이 해에 통일호형 보통객차 5량, 비둘기호 객차 154량, 객실 및 수화물차 3량, 수화물우편차 8량 등 170량을 신조 출창시켰다. 이듬해인 1963년에는 통일호 객차 18량, 비둘기호 객차 115량, 객실 및 수화물차 26량, 수화물우편차 2량, 무개차 200량 등 361량을 신도 출창시켰다. 1964년에는 식당차 3량, 비둘기호 객차 40량 등 43량을, 1965년에는 통일호 객차 5량, 비둘기호 객차 114량, 객실 및 수화물차 10량, 수화물 10량, 수화물우편차 7량, 협궤객차 6량 등 152량을 제작 출창시켰다. 1966년에는 식당차 2량, 침대차 2량, 통일호 객차 5량, 비둘기호 객차 30량, 수화물 9량, 유개차 200량, 무개차 200량 등 객화차 448량을 신조 출창시켰으며, 1967년에는 유개차 300량, 무개창 80량, 조차 20량 등 화차 400량을 신조 출창시켰다. 1968년에는 비둘기호 객차 50량, 수화물차 20량, 유개차 90량, 장물차 260량, 곡형특수장물차 1량 등 객화차 421량을 신조 출창시켰는데, 이 중 곡형특수장물차 1량(85톤)은 쌍용양회(주)의 사유차량을 특수 제작한 것이었다. 1969년에는 군병원 객차 7량, 식당차 10량, 비둘기호 객차 41량, 협궤객차 12량, 유개차 450량, 조차 50량 등 객화차 570량을 신조 출창시켰고, 1970년에는 비둘기호 객차 90량, 유개차 150량, 무개차 300량, 차장차 50량 등 객화차 590량을 신조 출창시켰다.
1971년은 철도청 자체 제작으로는 마지막에 해당하는 해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50톤 용량의 화차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무개창 120량, 장물차 390량을 생산하였던 한편, 비둘기호 객차 10량까지 객화차 총 520량을 제작 출창시켰다.
1972년 7월부터는 국산차량의 본격적인 제작 체계를 갖추기 위하여 인천공작창을 객화차 전담창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1974년 8월에는 설비과를 폐지하고 그 업무를 기술과에 편입시켰다. 그 후 1984년 2월 16일부로 폐창하고 대전철도차량정비창으로 그 기능이 흡수 통합되었다.
인천공작창이 떠난 이후 공장 부지에는 미륭아파트와 동부센트레빌아파트가 세워졌다. 송현동 66-26번지(화수로 38)에 세워진 동부센트레빌아파트는 1989년에 분양을 받아 1990년 5월에 입주를 시작했다. 송현동 66-24번지(화수로 44)에 세워진 미륭아파트 역시 1990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입주민들이 들어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인천공작창 관련 직제
법령 호수
공포 연월일
개정 내용
대통령령 제530호
1951.09.03.
영등포공작창, 인천공작창을 신설하고, 인천공작창에는 기술 제1과, 기술제2과에 해당 업무를 처리하게 하기 위하여 기술과를 신설
대통령령 제1528호
1959.11.25.
인천공작창을 폐지
각령 제202호
1961.10.02.
인천공작창을 신설
대통령령 제10422호
1981.07.23.
부산공작창의 위치를 “부산시”에서 “부산직할시”로, 인천공작창의 위치를 “인천시”에서 “인천직할시”로 변경
대통령령 제10576호
1981.11.02.
공작창장 직급 조정
대전 및 인천공작창장(2,3급→3급)
대통령령 제11352호
1984.02.16.
인천공작창을 폐시
공작창을 철도관서직제로 통합 개편
철도청 인천공작창 관련 사건 연보
1899.06.17.
경인철도회사 인천공장 설립
1899.06.18.
미국 모갈탱크 기관차 시운전
1899.07.
경인철도, 모갈형 기관차 인천공장 조립
1908.04.24.
인천공장이 용산공장에 합병
1937.10.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 인천공장 설립
1937.11.01.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 인천공장 종업원 동맹파업 단행
1938.07.19.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 인천공장 매립 허가
1945.12.03.
조선차량주식회사 발족
1948.02.
조선차량주식회사 관리인 유재룡 횡령사건
1950.
조선차량주식회사 인수
1950.10.
인천공작창 발족
1951.01.18.
대통령령 제530호에 따라 인천공작창 신설
1951.01.
1‧4후퇴시 부산공작창으로 철수
1951.09.03.
인천공작창 개창
1959.12.
대통령령으로 인천공작창 폐쇄
1961.10.02.
객화차 신조를 위하여 인천공작창 개창
1962.01.30.
인천공작창 조업 개시, 객화차 및 협궤객차, 수화물우편차 등 제작
1972.07.01.
인천공작창이 객화차전담창으로 전환
1974.08.29.
인천공작창 설비과를 폐지하고 업무를 기술과에 이관
1984.02.16.
인천공작창을 폐창하고 대전 철도차량정비창으로 흡수통합
1990.
인천공작창 운행 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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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인천공장
현재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약의 연원은 해방 이전 조선화약공판 주식회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화약공판은 1942년 일제의 기업정비령을 배경으로 일본 대기업들이 출자하여 설립된 조선 내 유일한 화약 판매 독점 기업이었다. 1942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따르면, 조선화약공판은 미야모토 마사하루(宮本正治)를 대표로 하며, 화약류의 매입판매 및 수이출입, 그에 관련한 사업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유지(朝鮮油脂)가 최대주주 중 하나로 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리하여 조선유지를 비롯한 조선 내 화약 공장들이 통폐합되었고, 조선화약공판이 구매 및 수요처 배급, 생산량 할당 등을 총괄하면서 화약류 판매를 전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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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앤엘 인천공장
주식회사 ㈜선앤엘은 1959년 10월 17일에 설립됐다. 회사의 영문명은 SUN&L Co., Ltd이다. 2021년 3월 26일 ‘선창산업㈜’에서 ‘㈜선앤엘’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본사의 주소는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 96(북성동 1가)이며, 계열회사는 모두 13개이다. 계열회사의 명칭은 ㈜선앤엘인테리어, 상원농산㈜, 성거산단사업단㈜, SUNCHANG ITS(CAMBODIA)CO.,LTD(해외법인/캄보디아), SUN&L Vietnam CO., LTD.(해외법인/베트남), SUN&L New Zealand Limited(해외법인/뉴질랜드), SUN&L Singapore PTE.LTD(해외법인/싱가폴), MYANMAR KOREA TIMBER INT'L LTD(해외법인/미얀마), SUN&L Kunshan Plastic Products Co., Ltd.(해외법인/중국), SUN&L Myanmar Interior CO., LTD.(해외법인/미얀마), SUN&L Myanmar Holdings Limited(해외법인/미얀마), SUN&L Myanmar Auto Service(해외법인/미얀마), SUN&L Interior Canada CO.,LTD.(해외법인/캐나다) 등이다.
주요 사업은 크게 목재, 가구, 생활용품, 기타 사업으로 구분된다. 목재부문의 경우, 합판, MDF, 제재목, PB 등을 생산, 유통, 판매하고 있고, 가구부문은 목창호, 인테리어, 건가구 등을 건설사로부터 수주를 받아 시공하고 있으며, 2021년부터는 자회사인 ㈜다린을 흡수합병하면서 생활용품 부문을 추가하여 플라스틱 포장용기의 Plastic Pump Dispenser와 Plastic Hand Trigger Sprayer 등을 생산, 유통, 판매하고 있다. 기타 벌목, 조림 및 산림개발, 부동산 임대 및 개발, 건설서비스업, 차량 정비 및 검사 등을 사업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중 2023년 4월부터 합판 생산을 중단하고 수입 유통사업으로 전환하였다.
선창산업은 본래 서울에 본사가 있었고, 공장은 서울, 인천, 대구 세 곳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1977년에 생산의 일괄성을 위해 서울공장을 인천공장으로 이전하여 통합하였고, 서울공장은 창고로 사용하였다. 인천공장은 의자류를 주로 생산하였고, 서울공장은 양복장과 책상 등을 생산해 왔었다.
선창산업에서 생산하는 가구 제품의 고유상표는 선퍼니처다. 1970년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했고, 1991년 무렵에 이 상표를 선우드로 바꿨다.




